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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 )에게

미안. 바빴어. 바쁜 중이다.


이번 연극의 기획님이시거든. 연극의 양대산맥 연출과 기획, 그 중의 기획. 대기획 최기획.

연극을 한참 하고 있을때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때이기는 하지. 그래서인지

연극때문에 한참 힘들때에는 일기를 쓰는 것이 조금 조심스러워질 때가 있어.


기대고 기대어 사람이라지만,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는 것이 멋적어. 어쩐지 쑥스럽고,

그래. 내가 쑥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말을 쓰면 사람들은 잘 안 믿지. 하지만 그래. 여하튼 그래서,

힘들면 힘들수록 나는 되도록 혼자 힘으로 버텨 나가는 편인데, 그런게 나도 모르게 쌓이잖아. 그걸

풀어줄 사람이, 요즘엔 없어. 단순히 여자친구를 말하는 게 아니야. 예전에도 많았던 건 아니지.

어쨌든 그래. 횡설수설, 오늘은 뭐했는데, 어떤 놈이 이런 미운 짓을 했는데, 뭐가 속이 상했는데

졸졸이, 풀어 놓기만 하면 되는데. 그럴 사람이, 그렇게 없네. 그런데 여기 오면 나도 모르게 쓰게 되

거든. 여기 무척 좋아하나봐. 술 마셔도 속내 비칠 정도로 취하는 건 정말 드문데.


외롭지. 외롭다구. 힘들기도 물론이지. 그래도 스물세살 씩씩한 청년 최대호는 안 울거든. 혼자서

잘 버텨 내거든. 일단은 어떻게든 살아낼 줄 알거든.


오늘은 신도림에서 인천가는 막차, 부평에서 동막가는 막차, 막차를 두번이나 탔어. 부평에서 잘 데

도 있긴 했는데 왜 뛰었는지는 몰라. 재미있었거든. 막차 타면, 소설에서나 만났던 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거든. 그런 사람들을 지켜 보고, 나도 그 사람들 중의 한명이고. 그런데,


그런데,


인천터미널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 킥킥 웃다가 문득 눈물이 났어. 문득이야. 나도 모르게 갑자

기라는 단어이지. 문열어 득칠아의 줄임말이 아니야.


얼마 안 있으면 대보름이래. 달이 휘영청 밝았어. 그래서 눈이 부셔 눈물이 났을까.

화성이 몇백년만에 가장 가까워지는 해래. 그게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을까.

개그맨 양원경이 로또 한자리만 틀렸대. 남의 얘기라지만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을까.


보람차고 끝까지 재미난 하루였거든.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걷다가 혼자 자문해 봤던 그 질문 때문이었을 것도 같아.

'내가 왜 여기 있지?'

...예전에도 인생이 갑자기, 그리고 급격히 틀어질 때마다 비슷한 질문은 한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였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고. 혹독했어. 혹독했어.


답을 찾지 못해서, 눈물이 났을지도 몰라.

아니면 오늘 먹은 순대국밥이 얹혀서 명치근처를 쿡쿡 찔러대는 통에 아파서 났을지도 몰라.

아니면 사내자식이 별거 아닌 일로 짠다고 머리를 때리고 콧물을 닦아줄 이가 없어서 났을지도 몰라.


잘 자, 최기획. 넌 멋진 놈이야. 이건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