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9

????






넓이는 군대 내무반의 한 자리보다 좁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을 그간의 거주지 중 손에 꼽을 정도

로 만족하게 만드는, 하교길의 골목. 여름에도 새벽이면 운치있는 곳인데, 요 며칠새 가을로 넘어가

면서 가로등의 빛이 더 짙어졌길래 사진을 찍어보았다. 전등 아래에 서서 눈을 감고는 좋아하는 노

래를 한 곡 온통 듣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으면 시멘트 벽 사이 어디선가 가을벌레가

찌륵찌륵 운다. 삼사분 정도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을 감싸는 것은 딱 견디는 게 오히려 즐거운 정도

의 추위이다.


지난 금요일에, 일주일의 일과 중 가장 즐거운 활동인 야구단 연습을 하던 도중 손톱을 다쳤다.

특히 서투른 내야 바운드 공 잡기를 연습하다가 눈 앞에서 불규칙하게 튀는 공에 손톱이 세게 맞

은 것이다. 처음에는 까짓, 놀다 그런 것, 하고 생각했지만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나와 손가락을 타

고 흘러내리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혹 빠지기라도 하면 당장 밀려 있는 입력과 번역 일은 어쩌나 하

고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주위의 형들이 떠밀기도 하는 통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학생회관 2층에

있는 보건소에 가 보았다.


접수를 하고 줄을 서서는 점점 까매지는 손톱을 보면서 걱정하는 마음도 들고, 엉덩이에 주사라도 놓

자고 하면 딱 달라 붙는 야구 유니폼을 벗어야 하나 어쩌나 눈을 데굴거리고 있었는데 정작 치료실

의 선생님은 밀려드는 신종 플루 문의 환자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내 상처를 흘끗 보더니 얼음통 하

나를 건네 주며 자주 찜질을 해 주라는 한 마디를 하고는 등을 떠밀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멍청한

목소리로 아니 선생님 어떻게 주사라도, 등을 중얼거렸지만 선생님은 엄살 부리지 말고 접수비 백오

십 원이나 제대로 내시라고 말했다.


손톱이 아팠기 때문에 서당에서 필기도 못 하고 연구실에서 작업도 못 하게 되어, 토요일인 어제 사

놓고도 못 보고 있던 DVD를 몇 개나 보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연희동 쪽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가사를 외우고 싶던 노래를 몇 차례나 다시 듣기도 하고. 몇 달 만에 가을 옷을 걸치고서는 천하 한

량처럼 하루를 보내고 나니 마음에 빈 칸이 여럿 생겼다. 한편으로는 괜스런 쓸쓸함 같은 것이 들어

와 휘젓고 다녀 곤란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스스로를 젖게 하고, 혹은 참아

내고 하는 시간이 무척 즐겁다.


당장에 닥친 것은 없어도 미리 해 놓아야 할 일이 적지 않은 가을이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서 연

극을 보러 가려고 한다. 지난 연극열전에서는 황정민이 열연하였던 <웃음의 대학>이 봉태규를 주연

으로 하여 다시 상연한다고 한다. 송영창 아저씨가 맡았던 감독관 역에는 안석환 아저씨가 더블 캐

스팅으로 들어갔다. 안석환 아저씨를 연극무대에서 보는 것은 <남자충동>이후로 수 년 만이다.

연극을 보고도 시간이 남으면, 삼청동에 좀 걸으러 갈 거고, 당장 오늘밤엔, 연구실에서 책을 읽다

새로 익힌 촬영법으로 새벽달의 표면을 찍으러 나갈 거다. 뜻하지 않게 깨끔발로 하루 쉬었을 뿐인

데 가을이 아주 가을같아져서,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일기장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3년 전, 바라나시  (1) 2009.09.29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창 밖에 가을비가 내린다.  (1) 2009.09.22
최대호, 두 살.  (3) 2009.09.16
9월 9일. AM 06:30  (2) 2009.09.09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0) 2009.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