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遊記/2015 교토

6일차 - 1. 교토에 간 구보처럼

 

 

 

 

여행 6일차이자 교토 여행의 1일차.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하루만 비 오고 만다면야 목 좋은 술집 차고 앉아 다른 여행객들과 노닥거리면 그만이지마는 1주일 동안 맑은 날이 하루 있을 것이라면 비 온다고 놀 수는 없지. 게다가 발이 젖는 것이라면 이미 나오시마에서 이골이 났다. 끙차 하고 일어난다.

 

 

 

 

 

 

 

 

꼼짝없이 일주일 동안 우산 쓰고 다닐 판이라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딱 쳐다 봤을 때 가장 기분 좋은 색깔의 우산으로 골랐다. 샛노란 우산. 교토 여행이 끝날 때까지 좋은 친구 되어 주었다. 덕분에 여행을 다녀온 지 반 년이 넘은 지금도 길을 걷다 샛노란 우산을 마주치면 문득 교토 생각이 나 즐겁다. 그러고 보면 여행을 갈 때마다 독특한 색이나 모양의 가방이나 팔찌, 티셔츠 등을 일부러 사서 입고 쓰고 다니는 것도 기억을 남기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혼자서 휘적휘적, 낯선 골목길 사이사이를 걸어간다. 멈추고 싶은 만큼 멈추고 걷고 싶은 만큼 걷는다. 이것이 혼자 여행을 할 때의 가장 큰 낙이라 할 것이다.  

 

 

 

 

 

 

 

 

걷다가 배가 고파 늦은 아침을 먹었다. 돈까스 덮밥인 가츠동이다. 조금 짰지만 소금이 돌아야 힘이 나겠지 싶어 물을 들이켜가며 열심히 먹었다.

 

 

 

 

 

 

 

 

오후에도 내내 걸을 작정이고 또 비가 내려 쌀쌀한 탓에 뜨끈한 마실 것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어딜 가나 책이 꽂힌 서가는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일본의 서가에는 만화책과 잡지가 빠지지 않아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 중 이 날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위의 만화책. 여러 개의 작품이 일정한 분량으로 동시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정기적으로 출간되는 잡지인 듯 하였다. 집어들고서는 후루룩 넘겨보니 놀랍게도 모든 만화가 고양이에 관한 것이었다. 고양이를 능숙하게 그릴 줄 알거나 혹은 고양이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만화가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잡지가 출간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애완' 카테고리에서도 한 단계 아래인 '고양이 애완'과 같은 대단히 구체적인 소재를 소비할 만한 내수 시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1억의 인구라는 것이 다만 우리의 두 배일 뿐만은 아니구나, 이렇게 작은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숫자이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왔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책은 안 샀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하지만 비는 조금 잦아든 사이. 다음 목적지인 도지東寺까지는 삼십 분 정도의 도보면 충분하다. 흥흥 노래하며 걸어가는데 동네 한 복판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보인다. 평범한 주택 사이로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듯한 절이 슥 섞여 있는 것은 교토에서 흔한 모습이다. 제대로 보았나 하고 눈을 씻고 다시 본 것은 '인형공양'이라는 한자이다.

 

 

 

 

 

 

 

 

인형공양은 일본의 독특한 정신문화 중 하나이다. 무엇이 되었든 오래도록 사용하거나 곁에 둔 물건에는 혼이 실린다는 사상을 전제로 한 것이니 사람의 모양을 한 인형이라면 그러한 인식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놀던 인형 등의 명복을 빌며 공양을 바친다고 하는데 사실 가장 많이 바쳐지는 것은 히나마쓰리雛祭 때에 전시했던 여자아이 인형이다.

 

히나마쓰리는 매해 3월 3일이 되면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에서 아이의 장수와 무병을 빌며 치루는 일종의 의식이다. 축제라는 뜻의 마쓰리祭 자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마쓰리와는 달리 집에서 인형을 전시해 놓고 감주나 복숭아 등을 놓아 공양하는, 가족 행사의 형태를 갖는다. 이 때 전시하는 인형이 히나雛 인형이다. 

 

 

 

 

 

 

 

일본어 히나雛에 쓰이는 한자 雛 자는 익숙한 자는 아니다. 본래는 새의 새끼를 형상화한 글자에서 출발해서 아이, 어리다 등의 뜻을 갖게 됐다. 글자는 낯설지만 인형의 모양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귀신 만화, 혹은 '인형의 머리가 자랐다!'와 같은 납량 영상 등에서 흔히 보던 그 인형이다. 이것은 본디 중세 시기 귀족 가문 소녀의 일반적인 행색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엇이 됐든 비나리고 한적한 경내에서 혼자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입을 열고 말을 할 것만 같아 조금 섬뜩하다.

 

 

  

 

 

 

 

 

그래도 피부가 살색인 히나 인형은 참을만 했는데 새하얀 얼굴의 인형과 눈높이를 맞추고 쳐다보고 있자니 오금이 저린다. 내가 좋아하는 옛 괴담류 중에는 인형에 혼을 빼앗긴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얼른 도망을 가자.

 

 

 

 

 

 

 

 

한자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으면 일본 여행이 한층 재미있어진다. 멍 때리고 걷다가 문득 눈에 띈 '교토 두부 회관'. 반투명한 창 사이로 기웃거려 보았지만 전시관이나 두부 시식관 같은 것은 없고 진짜로 두부 관련 업체들의 연합회인 것 같았다. 초당 두부에 간장 한 바퀴 휘 둘러서 뜨끈하게 떠먹으면 좋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휘휘 걸어간다.

 

 

 

 

 

 

 

 

마을 어귀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재미난 포스터. '선거에 가자'. 교토 시의회와 부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인가 보다.

 

작년의 교토 여행에서는 교토의 버스와 지하철을 예쁜 소녀로 의인화한 캐릭터를 재미나게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캐릭터마다 이름과 설정까지 붙어 있어 역시 만화 강국 일본, 하면서 쳐다보았던 것인데. 이번에는 어떤 캐릭터일까 싶어 멈춰서서 읽어봤다. 

 

 

 

 

 

 

 

 

쿄우노京野 미쿠. 선거에 흥미를 가진 20세의 여자대생.

 

쿄우노京野의 쿄우京는 교토京都의 쿄우京렷다. 우리로 치면 인천의 캐릭터가 김인천 군인 셈이니 그것 참 재미나구나. (후에 검색해 보니 쿄우노京野는 일본에 많이 있는 실제 성씨였다.)

 

나는 대학 입시에서 재수를 하였는데, 두 번째 치룬 수능에서는 첫 번째 때에는 없었던 제2외국어 과목이 신설되는 일이 있었다. 고교 재학 시절에 중국어 수업 시간이 있긴 했지만 내신 비중도 낮았고 모두들 재수는 남의 일인 줄만 알았기 때문에 공부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니하오나 셰셰와 같이 온 국민이 아는 정도 말고는 정말 할 줄 아는 중국어가 한 마디도 없었다. 덕분에 선택 가능한 외국어 중 제일 쉽다는 일본어를 택해서 피눈물 흘리며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부터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배워 놓은 일본어로 이렇게 십수 년 지나 일본 어딘가를 걷다가 미쿠라는 이름도 척척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니. 뭐든지 배워 놓으면 언젠간 써먹게 된다는 평소의 신념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선거에 흥미를 가진 여대생이라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고 나랏일 특유의 후진 센스 느껴지지만 예쁘고 귀여운 그림 그려서라도 포스터를 한 번 쳐다보게 만드는 시도는 좋은 것 같다. 선거장에 가면 혹시 미쿠 같은 여자애가 있을까 하고 한 명이라도 더 기어나오면 좋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