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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4

냉장고 도둑에게 부치는 글

 

 

 

월세에 살면서 겪는 골치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공동 냉장고의 음식을 훔쳐먹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비누나

 

샴푸를 다른 사람이 쓰는 게 싫다면 내 목욕바구니를 만들어 놓고 화장실로 샤워하러 갈 때마다 들고 다니면 된

 

다. 하지만 음식은 그럴 도리가 없다.

 

 

고시원에 살 때엔 그럴 일이 없었다. 한 층에 4-50명이 사는 터라 애당초 냉장고에 자리도 없었고, 조금 과장해

 

서 말하자면 음식을 넣어둔 뒤 삼십 분만 있다가 가 봐도 없어져 있는 터라 아예 쓰질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만 사든지, 혹은 남더라도 방 안에 놓아두었을 때 상하지 않는 종류의 음식만을 사던

 

기억이 난다.

 

 

지금 사는 월세집으로 온 지는 사오년 여가 됐다. 그간은 1년에 한두 차례 정도, 그러니까 좋게 봐주자면 술 마

 

시고 냉장고를 열었다가 무심코 남의 것을 먹었다든지 하는 등의 실수로 봐 줄 수 있는 횟수만 있었다. 없어지는

 

것도 기껏해야 콜라 몇 모금, 아니면 계란 한두 개 정도에 그쳤다.

 

 

런데 올해 들어서는 횟수도 부쩍 늘고 없어지는 음식의 종류도 아주 다양해졌다. 화가 나면서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서 놓고 지내던 차에, 오늘 오전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 전 인천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의

 

후배가 임실에서 부쳐 왔다는 고급 치즈를 몇 개 얻어온 것이 있었는데, 가져온 고대로 넣어둔 치즈가 반 이상

 

이 없어져 있었다. 상자를 열면 바로 꺼낼 수 있는 치즈도 있었지만 비닐을 뜯어야만 꺼낼 수 있는 치즈도 있었

 

는데 비닐까지 뜯고 모든 종류별로 반 이상을 가져갔다.

 

 

망연하게 냉장고를 쳐다보며 서 있다가, 강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긴 샤워와 점심 식사 중 한 가지를 포기해

 

야 할 상황이었는데 둘 다 포기하고 앉아서 냉장고 도둑에게 편지를 썼다. 다 쓴 편지는 출력해서 냉장고 앞면

 

에 붙여두고, 혹 자기 얘기인 줄 모르고 안 읽을까봐 남은 치즈의 박스 안에다가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다. '냉

 

장고에 붙여 놓은 편지 읽어봐라', 하고. 쓰기 전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는데 하루를 마무리 짓고 집에 와

 

서 냉장고 앞에 서 읽다보니 쓸 것이 없어 한동안 비워두었던 '일기' 카테고리에 올릴 거리 하나 생겼다 싶어 한

 

편으론 잘됐다 싶기도 하다. 다음은 편지의 전문이다.

 

 

 

 

 

냉장고의 다른 사람 음식 가져다 먹는 학생 보아라. 내가 이 건물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 가장 나이가 많을 거야.

 

말 편하게 할게.

 

 

나는 이 건물에 산지 4, 5년쯤 됐거든.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이 사라지는 건 그 이전에는 거의 없다가 올해에만

 

몇 차례 있었어. 너는 아마 작년이나 올해 이사 온 친구인 것 같아.

 

 

처음에는 따 놓은 페트병의 음료수가 몇 모금 사라져 있든지 간단한 주전부리 몇 개 없어지는 정도였는데, 요새는 아예

 

새 음식의 비닐을 네가 따서 먹더라. 어떤 음식은 반 이상이 없어지기도 했어. 걸리지 않으니까 점점 대담해지는 것 같

 

아.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다. 액수가 어떻게 됐든 자기 물건을 도둑맞는다는 게, 남에게 무시를 받는 기분이 들잖니? 나는

 

이 언저리에서 십여 년 째 살고 있는 중이라, 이 건물 사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동네 동생이고, 어쩌면 학교 후배일 수도

 

있으니까. 연관이 있는 사람에게 당했다는 생각을 하면 더 화가 나기도 하고. 내 방은 냉장고의 옆방이라, 어쩌면 방에

 

누워있을 때 바로 옆에서 도둑을 맞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참 화 나는 일이고. 냉장고 소리가 날 때마다

 

방문을 열고 나가서 확인해 볼까, 아니면 건물 주인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냉장고 앞에 카메라를 달아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지내다가 오늘 냉장고를 열고는 더 대담한 도둑질의 결과를 봤다. 너는 네가 한 일이니까 잘 알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좀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네가 가져다 먹은 음식을 떠올려 보니, 조리가 필요하

 

거나 밥과 함께 먹는 반찬이거나 아니면 당장 절도 혐의가 걸릴 고가의 의약품 등은 없었어.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집어

 

서 입에 털어 넣으면 그만인 음식들이었지. 만약에 라면이나 김치 같은 것을 훔쳐 먹었다면, 나도 이 비싼 대학교 등록

 

금 대고 생활비 버느라 학부 내내 고생했으니까, 힘들고 배고파서 그랬나보다, 하고 생각을 할 텐데. 너는 그저 재미로,

 

냉장고를 열었을 때 눈에 띄는 것 중에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없어져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것 위주로 훔쳐 먹었던 것

 

같아. 그것은 참 못된 일인 것 같다.  

 

 

이 건물에 방값을 내고 살 정도면, 이런저런 잔돈 잘 아껴서, 네가 훔쳐 먹은 음식들 정도는 살 수도 있었던 거잖니? 당

 

장 나가서 사 먹기가 귀찮다든지, 아니면 그 돈을 쓰기가 싫다든지, 그런 생각,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도 있지. 하지

 

만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실정법 위반이고 어쩌고를 떠나서, 사람으로서 참 못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만약에 내가,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어서, 네가 훔쳐 먹은 영상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면 너는 어떻

 

게 할래. 경찰서로 끌고 가서, 총액은 크지 않지만 상습적인 행위가 악질이어서 합의해줄 생각이 없다고 하면, 그때 너

 

는 나에게 무슨 말로 용서를 구할 생각이니. 아마, 이만큼 작은 도둑질으로 내 인생에 얼만큼의 영향이 끼쳐지겠어, 하

 

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보다 더 작은 일로도 삶이 크게 바뀌어버린 경우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감시를 한다든지 카메라를 달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지금은 없어. 그런 생각 하면서 살면 일단 피

 

곤하기도 하고, 또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살면 사람이 미워지고 내 마음이 피폐해지니까. 지금은 일단 네게 부탁부터

 

하고 싶다. 너는 이미 작긴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어. 이쯤에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작

 

은 욕망 때문에 인생이 잘못될 수 있었던 순간인데 한 차례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이제 그만 해 줘라. 지금 그

 

만두면 범죄가 아니라 실수로 끝날 수 있어. 그리고 뉘우치는 바가 있다면, 살면서 언젠가 실수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봤

 

을 때 용서해 줘라. 요새 새벽녘에 방이 많이 춥더라. 너도 같은 건물에 있으니 많이 춥겠지. 연말에 감기 조심하고, 새

 

해 복 많이 받아라.

 

 

원치 않게 이런 글을 읽게 된, 다른 방의 분들께는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친구가 언제 이 글을 읽게 될지 모르니,

 

한두 달 정도만 좀 붙여 놓겠습니다. 다들 행복한 일 많이 생기는 연말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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