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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

130220, <헌팅 트로피>

 

 

 

 

 

 

'헌팅 트로피(Hunting Trophy)'라는 것이 있다. 단어가 낯설어서 그렇지 위의 사진만 보면 누구나 알 법한, '사냥

 

한 짐승의 머리 박제장식'을 이르는 말이다. 사자나 표범의 경우도 이따금 구경할 수 있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사슴이나 순록, 버팔로 등의 종류이다.

 

 

 

나는 사슴과 그 비슷하게 생긴 동물들에 대해서는 뚱해 보이는 콧등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 뿔에 대해서

 

큰 흥미를 갖고 있다. 유년기에 읽었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서 뮌히하우젠 남작이 사슴 뿔에 버찌나무

 

를 키우며 버찌를 따먹었다든지, 청소년기에 접했던 <대망>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맹장 혼다 헤이하치로가 그

 

구를 사슴 뿔로 장식하였다든 하는 이야기 등에서는 정말이지 사타구니가 저릿저릿한 기묘한 호기심이 솟았

 

다. 그 이후로도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음미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와중에 헌팅 트로피를 다시 눈여겨보게 된 것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화이

 

트 데이에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던 나는 시간을 쪼개어 평소 별러왔던 '공예'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마

 

음을 먹었다. 무엇을 만들지 무엇으로 만들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만들어보고 싶은 물건'부터 정해 놓

 

고 나야 연습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희번덕거리던 차, 그 뿔의 모양에 항상 감탄해 오던 헌팅 트로피

 

가 새삼 기억이 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상 실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지만, 애초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던 분야는 목공예였

 

다. 성공하여 여유 시간이 많아지거나 혹은 은퇴한 뒤에 반드시 익혀보고 싶었던 취미 생활이기도 하다.

 

 

 

그런데 찾아보니, 목공예 DIY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우드 크래프트에 이미 기성품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훌

 

륭한 형태로. 이래서야 낑낑대며 나무 파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나무나 칼을 살 돈도 없었던 주제에 성이 난

 

나는 씩씩거리며 좀 더 검색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헌팅 트로피에 관심있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가격이 좀 비싸고 무게가 나가는 목재 헌팅

 

트로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탈부착이 쉬운 우드락 헌팅 트로피는 이미 인터넷에서 한 차례 큰 인기를

 

끌고난 뒤였다. 조립만 하면 되는 제품도 쉽게 구할 수 있거니와, 개인들이 올린 도면을 다운받아 스스로 만들

 

어 올린 사례도 아주 많았다.

 

 

 

 

 

 

 

 

 

 

 

게다가 우드락이라는 재료의 특성 상 채색이나 도포가 용이하여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상품들도 많았다.

 

이래서야, 아까운 시간 들여 따라하기밖에 더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생각해 보다가 내가 택한 것은 철사공예. 경험은 많지 않지만 작은 소품이라면 칠팔 년 전 쯤 두어 개

 

만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무엇보다 화방을 찾고 공예 기법을 검색하고 하는 등에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던 요

 

즘의 신세가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철사라면 쉽게 구하고 쉽게 조물딱거릴 수 있으니까.

 

 

 

거주하고 있는 연희동의 철물점을 찾아 보니 오래 전에 썼던 둘둘말이 철사는 팔지 않고, 위의 사진처럼 굵기

 

별로 두 묶음만을 포장하여 비싸게 팔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낭창낭창 철사를 감아대다가 기억난 사실이다. 처음 철사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었던 때에는 아버지의 충고

 

따라 처음부터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한참 만들다가 떠오른 사실이고 떠올라봐야 목장갑도 없고 했기 때문

 

그대로 진행을 했는데, 덕분에 철사에 찔리고 베인 상처가 잔뜩 나는 탓에, 과정을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흔들려

 

서 못 쓰게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꿉뻑꿉뻑하며 세수를 하러 간 나는 손에 물이 닿자 정말 글자 그대

 

로 '아야야'하고 소리를 냈다. 철사를 다룰 때에는 북핵을 다룰 때처럼 조심조심하자.)

 

 

 

일단 머리 모양부터 짰다. 굵은 철사로 선을 삼고 얇은 철사로 면을 삼았다. 싸구려 펜치 하나가 도구의 전부라,

 

반듯반듯한 모양이 안 나올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틀을 못 잡을 줄은 몰랐다. 어차피 이것

 

이 화이트데이의 선물도 아니고, 철사에 익숙해지고자 연습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될대로 되라지 하고 손 가는

 

로 감아봤다.

 

 

 

 

 

 

 

 

 

 

 

 

머리를 완성하고는 '목' 부분에 손잡이를 만들어 달아 주었다. 뿔과의 무게중심을 고려해 보면 이쯤에 달아 두어

 

야 안정되게 벽에 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론 실제로 걸어 둘만한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았고 서글픈 월세 신

 

세이기 때문에 벽에 못을 박을 수도 없어 위치 선정이 잘 되었나는 실험해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뿔 부분. 사진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실제 길이는 약 세 뼘 정도. 그러니까 60-70 cm 정도 된다.

 

고작해야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에 불과한 머리 부분에 비해 과도하지 않을까 싶겠지만, 실제 헌팅 트로피의 비

 

율이 이 정도이다. 하긴 그렇게까지 크니까 사람들 눈에도 띄고 장식할 정도로 예뻐 보였겠지.

 

 

 

뿔에는 여러 색다른 모양이 있지만 초보인 나는 조형이 용이한 평범한 모양을 택하기로 했다. 베이스가 되는 가

 

장 긴 철사가 양 쪽 끝에서 안쪽으로 휘어들어 오며 끝나고, 그 중간중간 양 쪽 세 개씩의 가지가 달리는 모양이

 

다.

 

 

 

이 과정에서 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위의 사진에서는 가장 안쪽 뿔에만 감겨 있는 '공예용 철사'를 발견한 일

 

이었다. 특별한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구도 쓰지 않는 판이라 뿔 모양을 베이스 그대로 표현해 내는데

 

려움이 있었다. 굵은 철사는 몇 번만 감아도 두툼해지는 터라 부피감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했지만 워낙 단단해서

 

예쁘게 감기가 어려웠다. 얇은 철사는 감기도 쉽고 비교적 섬세한 모양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부피감이 날 정도

 

로 감기에는 들어갈 시간과 재료비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아마추어 철사 공예의 선배님들은 이 난국을 어떻게 빠져나갔는가 싶어 검색을 해 보니,

 

공예용의 철사가 따로 있었다. 공예용 철사는 보기에 아름답게 매끈매끈한 도색이 잘 되어 있고 게다가 연질이

 

라 쉽게 휜다고. 확실히 무식하면 고생이다, 라고 뇌까리며 동네의 모닝 글로리에 가 보니 메이드 인 차이나의

 

공예용 철사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개중 굵은 은색을 골라 집에 와서 감아보자 과연 소개대로 매끈매끈했고 과

 

연 낭창낭창했다.

 

 

 

 

 

 

 

 

 

 

 

중간에 앗차 하고 허겁지겁 만든 귀. 귀가 전체 헌팅 트로피의 미적 완성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모양

 

을 간략화한 나무나 종이 제품들에도 귀는 대부분 달려 있다.

 

 

 

 

 

 

 

 

 

 

 

 

아무튼 결과물. 결과가 나서 결과물이라기보단 이때 엄청나게 바빠졌기 때문에 일단락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휑뎅그레한 목 부분이 특히 마음에 걸리지만, 다른 부분들이라고 딱히 완성된 것도 아니니 일단은 철사 다루는

 

법을 익힌 정도로만 생각하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

 

 

 

 

 

 

 

 

 

 

 

 

후에 시간이 많이 나면 다른 재료를 사용해 좀 더 보강해 보고 싶다. 연습용 치고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나와 줬

 

지만 역시 아쉬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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