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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

아마도 올 해의 마지막 납량 팔월의 중순을 막 넘긴 지금, 아직도 뙤약볕에 돌아다니다가는 지치기 딱 좋긴 하지만 그래도 볕의 끝맛은 무자비한 한여름이 아니라 고추 말리는 향 나는 초가을이다. 납량의 납納은 들이다, 는 뜻이고 량凉은 서늘하다, 라는 뜻이다. 합치면 '서늘함을 들이다'는 말로, 우리말이 있을까 해서 찾아보니 '서늘맞이'라는 예쁜 말이 있었다. 사전에 기재된 표준어이니 자주 써도 좋겠다. 위의 사진은 언젠가 써먹어야지 하고 받아두었던 KBS '전설의 고향' 포스터. 요새같은 날씨의 추세라면 올 여름에도 못 써먹고 넘어갈까 싶어 마침 딱히 쓸 것이 없는 날에 올린다. 얼핏 보면 별 거 없지만 처녀귀신의 눈과 표정을 찬찬 히 뜯어보다 보면 서늘함이 스물스물 들어온다. 역시 구관이 명관. 옛 시리즈 가운데 '내 다리 내놔' .. 더보기
토요 미스테리 극장 놀토가 없던 90년대 학생들의 고된 토요일의 끝에 큰 위안이 되어주던 . 배우 전무송 씨가 특유 의 음산하고 지친 목소리로 진행을 보았던 일종의 재연 프로그램이다. 전무송 씨는 영화 에서도 나레이터 역할 의 배역을 맡은 바 있는데, 아마도 감독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싶다. 1회부터 60회까지 모아놓 은 화일을 누가 올려놓았길래, 언젠가 보겠거니 하고 다운을 받아두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에어컨이 나오는 집에서 며칠을 자다가 다시 신촌 방으로 돌아왔다. 내 돈 주고 살았던 방 중에 서는 마음 속 왕좌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연희동 귀족집이었는데, 18'c 바람일랑은 추억에 묻고 선풍기 옆에 앉 아 있자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든다. 양로원 .. 더보기
<오래된 아이>, 7월 10일 대학로 열린극장 작년 이맘때쯤 아주 즐겁게 관람했던 공포연극 의 극단인, 극단 '옆집누나'의 2011년 공포연극, . 이 극단은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공포연극을 상연하는 모양인데,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의 연출이 이번 작품에서 도 연출을 맡고 있길래 기대하며 예매했다. 작은 입장권에 인쇄된 포스터만으로도 섬뜩했던 에 이어, 포스터 의 귀신이 아이유와 함께 지친 30대의 삶에 활력을 가져다 주는 카라의 한승연 양과 닮아 느낌이 좋았다. 먼저, 스토리.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매 해 열리는 축제 때마다 목사의 비밀스런 주재 아래 구성원들이 식인의 의례를 갖는 마을이 있다. 15년 전, 목사의 딸인 '인후'가 이 장면을 목격한 뒤로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그 뒤로 실의에 빠진 목사의 아내 앞에 돈이나 그 외의 이 익을 .. 더보기
모서리 귀신 대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만났던 여자친구는 지방 출신으로 이대 근처의 하숙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난 양가의 규수이자 소녀들로부터 순결서약을 받아내는 특정 종교의 독실한 신도였던 그녀는, 내가 인사불성으로 만취하였거나 뜻하지 않게 인천행 시외버스의 막차를 놓친 때 등이 아니면 좀처럼 방엘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중과 남고를 거치면서 여학생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딱히 뭘 한다기보다 여자친구의 방에 들어가 놀 고 있는 그 자체가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 거듭 출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아무리 신입생의 즐거운 3월이라지 만 떡이 되도록 마셔댈 술자리가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수 회사가 파업을 하여 시외 버스가 일찍 끊겼다는 핑 계도 열 번을 넘길 수는 .. 더보기
<두 여자>, 6월 24일 대학로 라이프 시어터. 내 인생 첫 소셜커머스 상품은 공포 연극 티켓. 사랑티켓보다 싸길래 기뻐 날뛰며 관람하고 돌아왔다. 이제 와 말씀드리지만 작가와 바람둥이라는 이중 인격을 감쪽같이 연기한 (2002),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윤회의 영겁성이라는 화두를 던진 연출 데뷔작 (2003) 등 나는 공포 연극에 혼을 바쳤던 연극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춘기의 사촌 동생을 데리고 공포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그녀석이 기말고사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께 꾸지람을 들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제 버릇 개 못주고 이토 준지처럼 겅중겅중거리며 또 보러 다 녀왔다. 이번 작품은 포스터만으로는 역대 가장 기대되는 연극 중 하나였던 . 공포 연극은 본래 웃음(혹은 드라마)과 공포라는 '이완 - 긴장'의 반복 구조에 .. 더보기
문틈 새 며칠 전 새벽 불을 끄고 누워 있다가 우연히 문 쪽을 보았는데,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딱 사람 키만큼 막혀 있었다. 일어나 문을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쳐다보니 빛은 모두 멀쩡하게 새어들어오고 있 었다. 누운 자세 때문에 사각효과가 있었을까 싶어 몸을 좌우로 굴려가며 쳐다보았지만 어디에서 보아도 다 이어져 있 었다. 괴상해 하며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한기를 느껴 잠시 깼는데, 눈을 다시 감으려다 문 쪽을 보니 또 사람 키만큼 의 빛이 막혀 있었다. 문소리도 발소리도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같은 층에는 네 명이 사는데, 나 외의 세 명은 모두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나간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