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2014.07.05 20:38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팀장으로 재직한 바 있는 신기철 씨의 신작. 부제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아직도 사회 전반에 선연한 상흔을 남기고 있는 6.25이지만 이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휴전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나는 6.25니까 6월 25일 하루동안 일어난 전쟁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 학생도 보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강의 중 전쟁 초기 대통령을 포함한 지도부의 행동이나 전쟁의 전황 등을 설명하면 난생 처음 듣는 내용에 경악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최근의 수 년간 진보적 역사학자들과 언론의 활약에 힘입어 전쟁의 비극 중에서도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차차 더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이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대통령소속 기관에서 주요 자료들을 직접 접하였던 저자가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구체적 주제를 정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한강철교 폭파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과 같이 그간 대중들에게 편린적으로 소개되었던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고 의혹으로 남아있던 질문들을 차례차례 해결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건들 배후에 일정한 맥락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진다. 그 '맥락'에 저자가 보내는 일갈이 바로 책의 제목이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책의 본문은 총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말'의 16페이지부터 20페이지까지 그 충실한 요약이 실려있다. 여기에서는 요약의 전문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내용을 아우르는 첫 문장만을 따다 인용하기로 한다.

 

 

- 제 1장은 이승만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기까지를 규정하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 제 2장은 한강인도교 폭파와 한강철교 폭파 실패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군의 전략과 민간 피난민 정책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 제 3장은 김포지구전투사령관의 탈영 사건을 계기로 7월 3일 한강 방어선의 붕괴를 초래한 전쟁 초기 김포 지역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 제 4장은 7월 5일 스미스 부대의 오산전투 패배를 중심으로 미 지상군의 한국전쟁 전략을 살펴보았다.

 

- 제 5장은 소총과 탄약이 없어서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는 국군이 자기 국민을 학살한 여력은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 제 6장은 충남 서해안 지역과 호남 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특징을 통해 한국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살펴보았다.

 

- 제 7장은 최근 각종 회고록에서 소개되고 있는 국방부 장관 음모설이 얼마 전까지 주장되던 전쟁유도설과 같은 근거를 하고 있음을 검토했다.

 

- 제 8장은 국군 17연대가 마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처럼 주장하는 한국전쟁사의 서술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 제 9장은 인민군 후퇴 시기이자 국군 수복 직전에 벌어졌던 '적대세력사건'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 제 10장은 폭격 미군과 토벌 국군이 갖고 있던 피난민 정책을 살펴보았다.

 

- 제 11장은 1950년 10월 국군의 수복과 동시에 발생한 '부역혐의학살사건'과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 과정을 검토했다.

 

- 제 12장은 헌법위원회가 대법원의 판단 없이 1심만으로 심판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선언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간단한 요약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잘 드러난다. 국군과 미군, 즉 '아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국지적-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전황에서 자국민의 보호가 우선 순위에 있기는커녕 매우 뒤쪽에 있거나 때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국가'의 말을 믿고 지시 사항을 그대로 이행하였던 국민들이 가장 먼저 소탕의 대상이 되었다.

 

저자는 책의 머릿말에서 2011년 천안함 침몰 사건이 한국전쟁의 초기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고 썼다. 해당 부처의 조사 결과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그 모순을 지적하는 발언은 사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다른 곳에 원인을 돌리고 정작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들은 무사하거나 도리어 영전하였다. 이 머릿말은 2014년 2월에 쓰여졌고 책은 4월 20일에 출간됐다. 출간 4일 전, 우리는 작가가 지적한 '한국전쟁의 초기 과정' 같은 모습이 천안함 사건보다 더 선연하게 드러나는 참사를 겪었다. 세월호 사건이다.

 

그래서 그 뒤로 이루어진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머릿말에서 직접 언급한 천안함 사건보다 세월호 사건이 더 많이 언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댓글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대응은 극으로 나뉜다. 60년이 지나도록 반복되고 있는 '지도층'의 행태에 실망하는 목소리,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가르쳐준 데에 대한 감사의 목소리 등이 있는가 하면 위태로운 시기에 국론을 어지럽힌다는 질타의 목소리도 있다.

 

국정조사가 진행 중인 지금, 나는 이 책과 세월호 참사를 얽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단, 얼마 전 있었던 지방선거에서는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여당의 참패가 예상되자 국회 과반수에 달했던 집권 여당 소속이면서 '도와주세요'라고 머리를 숙여가며 1인 선거운동을 했던 한 국회의원이, 선거가 끝나고 한 달 뒤 시작한 세월호 국정조사에서는 유가족을 향해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장면을 보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란 정말정말로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먹은 오늘, 정말 거짓말처럼, 대호야, 이래서 역사는 공부해야 하는 것이란다, 라고 가르쳐 주는 듯한 기사 한 편을 읽었다. 남편은 보도연맹 사건에 끌려가서 죽고, 아들은 월남전에서 몸을 버렸고, 그리고 당신은 밀양에서 경찰과 맞서다 인대가 끊어졌다는, 여든여섯 김말해 할머니의 인터뷰이다. 이 국가가 적으로 만들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다음에 주소를 덧붙여둔다.

 

 

http://www.hani.co.kr/arti/SERIES/503/645517.html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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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2014.07.05 20: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4.07.15 16:29 [ ADDR : EDIT/ DEL : REPLY ]

독서일지2014.05.07 19:51

 

 

 

 

 

출판사 미디어트리거의 기획작.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 명의 패널을 초대하여 '대통령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토론을 하고 그 결과물을 정리해서 출간한다. 부제는 '윤여준, 이상돈, 이철희, 대통령을 이야기하다.'.

 

 

 

중앙집권형 국가에서 정치를 말할 때 대통령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첫걸음이다. 그 기획의 패널으로 굳이 이 세

 

명을 부른 이유로는 아마도 '합리성'이나 '관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에게는 모두, '속해 있는' 진영의 논

 

리와 완결이 일치하지는 않은 언행을 보인 공통점이 있다.

 

 

 

윤여준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으며 16대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소장을 지낸 바 있고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 캠프의

 

전략을 짠 '책사'로 유명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 때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무조건 사과하라'는 전략

 

을 지도하여 참패 위기에 있던 한나라당을 구원했던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는

 

안철수와 박경철의 '희망콘서트'를 후원하기도 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인 문재인을 지지하는 연

 

설을 하기도 했다. 그 뒤로는 안철수의 새정치연합과 함께 하다가 2014년 3월, 새정치연합이 민주당과 합당을

 

하는 과정에서 결별했다. (이 책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 이전인 2월에 출간됐다.)

 

 

 

중앙대 법대 교수인 이상돈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당

 

시 대통령이던 김대중, 노무현에게 날린 신랄한 독설은 보수층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 이후 보수의 재집권에 성공한 MB정부 하에서, 이상돈은 정부와 각을 세우는 의견을 내놓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4대강 사업은 추진되고 있는 중에도 그 의도와 부작용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하여, M

 

BC 100분 토론에서 화면 왼편에 자리잡은 패널이 정부를 공격하는 진기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진짜 보수'

 

를 표방하던 그는 19대 대선에서 김종인, 안대회와 함께 박근혜 캠프의 참신함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활약했지만 대선 이후로는 그에 값하는 활동상을 보여주지 못했고, 박근혜 정부 집권 1년차가 지난 뒤부터는

 

'비상식적 인사'나 '무너진 신뢰' 등을 근거로 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인 이철희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서 행정관을 지냈고, 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 당대표인 김한길 의원의 보좌관 직을 수행했으며,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에 몸을 담기도 했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 부소장을 거쳐 현재는 1인 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특히 19대 대선을 전후하여 활

 

발한 방송 활동으로 이른바 개혁-진보 진영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평론가가 되었다. 인생 대부분의 이력이 민

 

주당에 놓여져 있지만, 사안을 논함에 있어 당략이나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공과를 비교적 공정하게 가늠한다

 

는 평을 받아, 급격히 보수화된 방송 환경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론가로 자리잡았다.

 

방송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나 팟캐스트, 그리고 인터뷰 등에서는 현재의 민주당

 

전략팀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는 면도 있다.

 

 

 

이런 이들의 언행은 일각에서 '변절'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논거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또 자

 

신이 설득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자세'는 진영 간의 극단적인 대립과 정략이 심화되는 정세에서 많은 사람들

 

에게 '합리성'과 '관용'을 지닌 것으로 보여졌다. 특히 그런 일면이, 논쟁적일 수 있는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명된 까닭일 것이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종 제목인 <누가 해도 당신들보다 낫겠다>와 달리 토론의 주제 이름은 <대통령의 과

 

거,현재, 미래>였다. 제목 그대로 이 책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대부분 전현직 대통령에 관한 평가와 서로에 대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호명되는 대통령은 4대 윤보선과 10대 최규하를 제외한 9명이다.

 

 

 

총 11장 중 1장부터 9장까지가 각각의 대통령을 다루고 있다. 보통 20쪽에서 30쪽 가량의 분량인데, 가장 짧은

 

장은 전두환 대통령을 다룬 10쪽의 4장이며 가장 긴 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38쪽의 7장이다.

 

 

 

각 장은 다시 세 개의 소챕터로 나뉘는데, 책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소챕터는 대체로 '그 대통령

 

정권이 갖는 의미', '그 정권의 공', '그 정권의 과'로 구분되어 있는 듯 하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는 이 구

 

분이 엄밀하게 지켜지지는 않는다. 아울러 세 개의 소챕터라는 기준의 예외는 공이 빠지고 평가와 과만 있는 4

 

장 전두환 대통령이다.) 이 소챕터의 제목만 읽어봐도 -세 명이 파악하는- 한국 현대사의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책 목차를 이 독후감의 댓글로 첨부하려 한다.

 

 

 

윤여준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을 높게 평하거나, 이상돈이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공로를 인정하거나, 이철희

 

가 김대중의 전략적 면모를 재조명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평이다. 똑같이, 윤여준이 노무현의 '뺄셈 정치

 

'를 지적하거나, 이상돈이 DJP연합의 정략성을 비판하거나, 이철희가 박근혜의 불통을 거론하는 것도 놀랍지 않

 

다.

 

 

 

러나 윤여준이 김대중의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는 한편 이회창의 반개혁적 면모를 공개하는 장면, 이상돈이

 

노무현의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인정하는 한편 박근혜 정부 임기 1년에 대해 혹독한 점수를 내리는 장면, 이

 

철희가 이승만의 정치력이 김구보다 위였다고 평가하는 한편 노무현 정부의 아젠다 세팅 능력을 비판하는

 

장면 등은 무척 신선했다. 특히 여기에 이 패널 조합의 특장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토론 과정에서 합의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 세 인물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공과이다.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유신 전 박정희가 이룬 성과, 노태우의 북방외교,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

 

제, 김대중의 IMF극복 등이다. 반대로 입을 모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이승만의 권력욕, 박정희의 유신, 김영

 

삼의 IMF, 김대중의 측근 비리 등이다. 이렇게 한 명의 대통령이 공이든 과든 대체로 확실한 명암을 갖는 한편,

 

의미와 장단점을 논하는 데 있어 일관되게 부정적 평가를 받는 두 대통령도 있다. 각각 해당 장의 소챕터 제목으

 

로 문장을 만들어 보자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며 '업적은 없고 후유증은 큰' 전두환 대통령과, '건설사 CEO

 

스러웠'으며 '미디어법, 4대강, 대기업 편중'의 과오를 저질렀고 결국 '최악의 경제정책, 최악의 공공부채'를 남

 

긴 이명박 대통령이다.

 

 

 

각각의 대통령에 대한 9개의 장이 끝나고 나면 시점을 한국사회로 옮겨 문제점과 대안을 논해 본 10장 '미래를

 

말하자'와 11장 '지금 선 이 자리'가 시작된다. 여기에서는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의 개혁 방향을 토론하고 향후

 

크게 성장할 정치 인물들을 평가하며 박근혜 정부 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총평한다.

 

 

 

정리하자. 먼저 장점부터. 하나. 역대 대통령이 집권 순서대로 호명되며 그 공과가 평론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

 

에 한국 현대사에 처음 접근하는 사람에게 거칠게나마 큰 그림을 그리는데 아주 유효할 것이다. 둘. 어떤 형태로

 

든 권력의 최정상에 닿아 본 이들의 '뒷담화'가 섞여 있어 정보의 가치가 높다. 셋. 대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읽기가 편하다. 넷. 억지 주장을 펴지 않는 패널들이기 때문에 모범적인 토론을 공부하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되어

 

준다.

 

 

 

단점은 장점을 그대로 뒤집은 데서 나오는 것이 많다. 하나. 강연이 아니고 '알 만큼 아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얘

 

기라서, 평가의 논거로 사용되는 인물, 사건에 대한 정보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현대사의 굵직한 정보들을 미

 

리 알고 있지 않다면 어려운 독서가 될 수 있다. 둘. 언급한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권력에 맞닿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 본인이 특히 활약했던 시기의 이야기가 나오면 다소간 감정적이거나 양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

 

일 때도 있다. 셋. 대담의 녹취록 형식이라 막상 읽어보면 분량이 그리 길지 않다. 정리된 글이 아니라 발언한 것

 

을 받아쓴 것이라 입말체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발언자가 바뀔 때마다 한 줄씩 떼어서이기도 하다. 넷. 억지 주

 

장을 하지도 않지만 강한 반대를 하는 장면도 거의 없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놓고 하는 끝장토론이 아니고 정해

 

진 시간 내에 9명을 다루어야 하는, 현실적 한계를 갖는 토론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총평.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에 독자가 독서의 목적만 확실히 정해두고 읽기 시작하면 확실한 성과를 거

 

둘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풍부하게 갖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패널들의 발

 

언을 접하는 것 또한 여러 책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장점이다. 각 패널들의 팬인 독자나 약간 깊이 있는 현대사

 

개괄서를 원하는 독자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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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문에서 언급한, 이 책의 목차를 따서 붙인다.


    1. 이승만 대통령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말하다
    부인이 한국인이기만 했어도
    불행이 시작되다

    2.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그 선연한 빛과 그림자
    유신, 전과 후
    유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다

    3. 전두환 대통령
    태어나지 말았어야
    업적은 없고 후유증은 크다

    4. 노태우 대통령
    민주화의 가교/물통령
    북방정책, 통일정책은 분명한 공
    역사의 의미를 읽어라

    5. 김영삼 대통령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로 박수 받고
    씻을 수 없는 과오, IMF

    6. 김대중 대통령
    26년만에 당선된 집념의 사나이
    햇볕정책, IMF극복은 공
    게이트로 날이 저물다

    7. 노무현 대통령
    이회창이 진 선거일 뿐?
    개혁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들
    ‘참여와 평등’의 가치를 심다

    8. 이명박 대통령
    건설사 CEO스러운
    미디어법, 4대강, 대기업 편중, 그리고
    최악의 경제정책, 최악의 공공부채

    9. 박근혜 대통령
    야당이라는 인식으로 당선?
    변했나, 원래 그랬나
    변화는 가능한가

    10. 미래를 말하자
    개헌은 가능한가
    대한민국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 사람을 주목하라

    11. 지금 선 이 자리
    다시 이곳과 현재를 말하다
    뭔가 변하고 있다
    윤여준, 안철수의 새정추로

    윤여준·이상돈·이철희 인터뷰

    2014.05.07 19: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재밌는 조합이네요 윤여준, 이상돈, 이철희라니.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언제까지 대통령 개인의 한계로 국가가 흔들흔들 대는 걸 지켜봐야 하는지 걱정됩니다. 여담이지만 아마 MB가 2년만 더 해먹었으면 전두환만큼 분량이 적어지지 않았을가 싶습니다.

    2014.05.10 15:0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네. 세 사람은 공히 그 분을 너무 싫어해서, 2년이라는 시간을 더 같이 보냈더라면 정말 한 쪽 분량만큼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2014.05.11 04:43 신고 [ ADDR : EDIT/ DEL ]

일기장/20132013.04.19 21:14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13만 5천명의 지상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며 시작된 한국전쟁은 만 3년이 지난 53년 7

 

월에야 휴전 상태로 들어갔다. 전쟁 중 최초로 정전회담이 제의된 시기로부터도 25개월 뒤였고, 그간 이루어진

 

회담만도 총 765회였다.

 

 

 

내전으로 시작했으나 종국에는 냉전의 주요 축들이 모두 참가하게 된 이 전쟁이 한국인에게 남긴 상흔은 깊었

 

다. 전쟁 중의 사망자는 가장 보수적인 수치로도 3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반도 인구의 1/10에 달하는

 

수치였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5백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전쟁사에 여러가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 예로, 휴전 1분 전까지 원산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은

 

총 861 일간으로 이는 아직까지도 현대 미 해군 역사상 최장 기간의 공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끔찍한 기억은

 

엎드려 뻗쳐 자세에서 손을 뒷짐지고 머리만으로 체중을 감당하는 체벌의 이름인 '원산 폭격'에 그 흔적을 남겼

 

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한국전쟁의 참혹한 실상은 세계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몇몇 예술가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인 <한

 

국전의 대학살>, 혹은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정되지

 

못한 채로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

 

당의 의뢰로 한국전쟁 중의 한 사건인 신천 양민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여 그렸다는 설이다.

 

 

 

신천 양민학살 사건은 미군이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50일 간에 걸쳐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

 

구의 약 1/4인 3만5천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남한 측에서는 미군과 상관없이 반공

 

성향의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부군에 맞서 싸운 반공투쟁이었다고 주장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의 생

 

존자가 남긴 인터뷰도 있고, 처음부터 북한군이 날조해낸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자 피카소' 설을 신뢰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한국 정부에 의해

 

반미 작품으로 지정되어 1980년대까지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 상에 있었다.

 

 

 

 

 

 

 

 

중공군과 인민군 포로

 

 

 

전쟁의 가장 막바지에 이루어졌던 회담들은 주로 포로 교환에 관한 문제였다. 부상을 입은 포로가 우선적으로

 

송환되었으며 이후 일반 포로들도 차례차례 송환되었는데, 그 가운데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이 있었다.

 

총 47,000명이었다.

 

 

 

이들은 몇 가지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중립위원국인 인도군의 감시 하에, 먼저 본국의 대표들이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4개월간 설득을 했다. 포로의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사로잡힌 나에 정

 

착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북도 남도 택하지 않고 제3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이들이 있었

 

다. 유엔 총회는 이들을 위해 인도와 브라질 등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1954년 2월, 망명을 요구한 88명의 포로가 인도행 배에 승선하였다. 이들 중 56명은 브라질에, 15명은 인도에,

 

그 외는 각국으로 흩어져 정착을 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한국전쟁은 끝났다. 이 마지막 장

 

면은 당시 부산에 임시로 설치되어 있었던 서울대 법대의 한 재학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막 열아홉 살이 된

 

그의 이름은 최인훈(1936- )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그러나 50년대 한국 사회의 상황은 한 청년이 전쟁 중 받았던 심상을 차분히 가다듬고 있을 만큼 평화롭지 않

 

다. 전후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것은 대체로 해외로부터의 원조였는데, 57년을 기점으로 도움의 손길은 차

 

츰 감하게 되었다. 경제의 주요한 한 축으로 새로 등장한 재벌은 줄어가는 이 원조마저 독점하고 정경유착의

 

특혜를 바탕으로 성장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었다. 50년대 내내, 이들은 대통령직

 

과 여당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사사오입과 정치깡패 고용, 부정선거 등의 각종 술수를 아끼지 않았다. 와중,

 

56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58년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개헌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호였다. 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리한 상황에서

 

의 수권을 위한 거대한 기획이 모의되기 시작했다. 온전히 깨끗한 선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현대사에 있어 아직

 

지도 부정 선거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3.15 선거의 시작이다.

 

 

 

 

 

 

 

 

전임 김일환 내무부장관(좌측)과 신임 최인규 내무부장관(우측)

 

 

 

선거 한 해 전인 59년 11월,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전국 각 시, 도의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군수, 시장,

 

구청장 등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필승을 위한 지침을 하달한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4할 사전투표'와 '공

 

개투표' 전략이다.

 

 

 

'4할 사전투표'는 자연 기권이나 무효, 전출자 등으로 인해 전체 유권자 중 투표를 할 수 없는 이가 총 40%에 달

 

할 것이라 예측하고, 선거가 끝나면 미리 만들어 둔 40%의 자유당 표를 섞어넣는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최종

 

투표율이 60%쯤일 것이라 예상하고 나머지 40%를 이승만 지지표로 몽땅 채워넣는다는 것이었다.

 

 

 

'공개투표'는 유권자를 3인조나 9인조로 편성하여 공개적으로 투표하게 하되, 한 조의 조장은 반드시 자유당 당

 

원이나 경찰관, 공무원이 맡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이는 현대 선거의 4대 원칙 중 하나인 비밀 투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외로 야당의 후보 등록을 '서류 미비'로 끝까지 거부하거나 아니면 후보 등록을 하게 되어 있는 구청 앞에서

 

등록 서류 자체를 강탈하여 도망치는 치졸한 계획도 세워졌다. 이 전략들은 모두 다음 해의 3.15 선거에서 실제

 

로 시행되었다.

 

 

 

 

 

 

 

3.15 선거 당시 이승만 후보 포스터

 

 

 

 

선거 한 달 전, 민주당의 강력한 대권 후보로 이승만의 실질적 라이벌이었던 조병옥이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

 

으로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이로써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시되었지만, 3.15 프로젝트 자체는 취소되는

 

일 없이 꾸준히 진행된다.   

 

 

 

선거를 열흘 남짓 앞둔 60년 3월 3일, 야당인 민주당은 해당 서류를 고발한 양심경찰의 도움으로 '9할 5분 득표

 

를 위한 사전투표, 공개투표, 환표, 환함' 계획을 폭로한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전국에서는 부정선거 계획을 규

 

탄하는 시위가 잇달아 일어나게 된다.

 

 

 

3월 8일 대전과 부산. 3월 10일 대전, 수원, 충주. 3월 12일 부산, 청주. 선거 하루 전인 3월 14일에는 서울, 부

 

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3월 15일이 밝았다.

 

 

 

 

 

 

 

민주당의 3.15 선거 부인공고

 

 

 

선거는 예정대로 시행되었다. 많은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의 참관이 저지되었다. 마산의 경우에는 47개 투표

 

소 중 야당 참관인이 참관한 투표소가 3군데에 불과했다. 자유당의 참관인들만이 참여하는 개표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일 오전 열 시 삼십 분, 민주당은 3.15 선거를 무효로 규정하고 선거 포기 선언을 했다. 이날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발포하여 총 7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마산에서의 시위 도중, 열여덟

 

의 마산상고 학생 하나가 실종됐다. 

 

 

 

선거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을 찍은 표가 총 유권자 수를 초과

 

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군 부대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120%에 달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시위를 과잉 진압한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을 경질시킴으로써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체

 

 

 

4월 11일, 마산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체에는 눈에서 뒷머

 

리까지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경찰은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사인을 확인했

 

다고 한다. 이 학생의 이름은 김주열이었다.

 

 

 

부산일보의 마산 주재 기자 허종이 그의 사진을 찍었고, 사장이었던 고 김지태는 1면에 이 사진을 싣기로 결정

 

한다. 이 충격적인 사진은 전국에 퍼짐과 동시에 AP통신을 통해 해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이 날로부터 전국적 시

 

위가 시작되었다.

 

 

 

4월 19일, 13시 경 서울에는 이미 10만 명이 운집하였다. 13시 40분, 경무대 앞에 모인 2만 명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하였다. 15시에는 서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7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 총 111명의 민간인과 4명의 경찰이 죽었다.

 

 

 

 

 

 

 

 

4.19 당시 자료사진

 

 

 

계엄령 선포와 과잉 진압은 시위에 불을 붙였다.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25일에는 그간 학생들 위주로

 

이루어지던 시위에 대학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동참했다.

 

 

 

4월 26일, 오전 10시경 서울에는 이미 10만 명의 시민이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국적 시위 이후 7일간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승만을 움직인 것은 주한 미 대사였던 W. P. 매카나기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하야를 권

 

유한 것이 매카나기 본인이 아니라 매카나기가 전화를 바꿔준 CIA 국장, 혹은 CIA 한국 담당자 피어 드실바로, '2

 

시간 안에 총사퇴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됐든 이승만은 10시 30분

 

에 하야를 결정하고, 같은 날 오후 1시에 라디오를 통해 하야 선언을 한다.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 사본

 

 

 

4. 19는 성공으로 끝났다. 부통령 이기붕은 4월 28일 자정에 일가족을 쏴 죽인 뒤 본인도 자결하였고, 대통령

 

이승만은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하여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대

 

통령에 당선되고 신파인 장면이 총리로 내정되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 정도 대규모의 민중 시위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앞서의 두 운

 

동은 일차적으로 당대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4.19는 시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제와 6.25를 경험한 이

 

대부분이었던 시민들은 처음 주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자유를 만끽했다. 이 흥분의 소용돌이 안에, 그

 

이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군의 장교로 복무 중이던 스물네 살의 최인훈이 있었다.

 

 

 

 

 

 

 

 

최인훈

 

 

 

4.19가 최인훈에게 미친 강렬한 영향은 저자 본인이 육성으로 남긴 바 있다.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

 

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광장> 초판 서문 중)

 

 

 

마침내 찾아온,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도 되는 자유. 60년 여름의 두 달 동안 최인훈은 한 편의 소설을 집필하

 

고 그 결과물을 <새벽> 10-11월 호에 게재하였다. 제목은 <광장>. 주인공은 1954년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하

 

고 인도행 배에 몸을 실었던 88명 중 한 명이었다. 최인훈은 그에게 '이명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광장>은 인도행 배인 '타고르'호에 승선 중인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가기 위한 선상에서 남과 북에서 겪었던 지

 

난 일들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며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로부터 철저하

 

게 버림받았던 그의 이십 대. 최인훈은 이명준의 입을 빌어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의 실상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비판한다. 이 때 북한 사회를 환멸하는 데 비유로 쓰인 용어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광장'이며 남한 사회를 비

 

하는 데 쓰인 용어가 '밀실'이다.

 

 

 

양측 모두 자신의 체제를 옹호하고 서로를 힐난하기에 바쁘지만,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모순

 

투성이의 사회였다. 그 중 어디에도 발을 붙이고 싶지 않았던 명준은 제 3의 길을 택했고, 그 길로 가는 중인 타

 

고르 호의 선상에서 바다에 몸을 던진다.

 

 

 

<광장>이 나오기 전까지 50년대의 소설들은 '전후 소설', 혹은 '반공 소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쟁의 참혹

 

과 인간성 상실의 폭로는 전쟁 후 나오는 예술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천

 

일률적으로 같은 뉘앙스의 작품이 나오고, 그 작품들 중 일부가 때로 부당한 체제의 호위병으로 쓰이게 된다

 

분명한 문제가 된다.

 

 

 

<광장>은 이러한 이념적 분열에 균열을 가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격하는 사회 속에서 실종

 

되어 있던 '주체'를 확인시켰다. 이후로 현대 소설은 마침내 이념의 주박에서 풀려나 자신의 발로 전진을 시작하

 

게 된다. 소재와 주제 의식, 집필과 발표 시기, 그리고 문학적 의의에 있어 <광장>은 짝을 찾기 어려운 걸작이었

 

다. 그것이 아마도 발표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방 후 최고의 문학'으로 꼽히는 한편 100쇄를 넘기는 상

 

업적 성공 또한 거두게 된 동력원일 것이다.

 

 

 

1960년, 시민은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고 <광장>이라는 옥동자까지 받아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3년

 

간의 내전까지 겪은 나라에서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성공한 시민 혁명이 등장한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한국 사회는 기나긴 침묵

 

의 시기로 진입하게 된다.

 

 

 

 

 

 

 

6.25로 시작하여 4.19에서 완성된 <광장>. 그래서 나는 해방 후 현대소설을 설명할 때 반드시 <광장>으로 강의

 

를 시작한다. 작품 자체가 갖는 문학적 성취도 뛰어나지만, 소설은 사회의 반영이라는 시각을 이만큼 잘 보여주

 

는 작품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53주년을 맞은 4.19에, 그 연원을 소개하거나 의의를 분석하는 기사 하나 올

 

라온 데가 없어 서운해 하다가 평소의 강의록을 정리해 올려둔다. 오늘 최인훈 선생님은 무엇을 하고 지내셨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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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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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월 31일에 이용 씨에게 술을 얻어먹고 싶은 만큼이나 4월 19일에 최인훈 선생을 만나뵙고 싶은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2013.04.19 21:1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한 편의 강의 잘 읽었습니다. 손색없는 4.19강의면서 최인훈의<광장>의 이야기로군요.
    날실과 씨실이 잘 엮여있는 글을 읽어 오늘을 어찌 보냈는가와 달리 기분이 좋습니다.

    2013.04.20 00:3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비밀댓글입니다

    2015.04.26 17:2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