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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회사원 지수양을 만나다.

지난 주의 일이다. 몇년만의 심한 몸살로 종강 주의 수업은 몽창 빠지려고 했지만 화요일과 목요일

에, 수업과 선생님을 모두 좋아하는 두 강의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었다. 한 수업은 순차가 돌아올

뿐이었지만 한 수업은 나름대로 뽑힌 것이라 꾸역꾸역 준비를 해서 서울로 가는데, 문득 지수양과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자랑스레 인턴시험에 합격하여 사회로 잠깐 나가는 지수양에게,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꼭 한 번은 회사 근처에 가서 밥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했던 터였다. 그 지수양의 인턴생

활이, 곧 끝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다음주는 (즉 글을 쓰고 있는 이번주는) 기말고사와

대체 레포트 두방이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그 때가 아니면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썩 좋

지 않은 몸 상태임에도 지수양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의외로 약속은 금방 잡혔다.


남대문. 이름이야 당연히 알고, 누군가의 차를 타고도 내려 보고 택시를 타고도 내려 보고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두어번 본 것도 같지만 서울의 정확히 어디쯤에 있는지는 몰랐다. 서울에서는 항

상 이렇게 머리속에 정확한 좌표가 떠오르지 않아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다. 계속해서 이어진 '땅'의

이미지가 없달까. 서울에서 내가 물리적 실제를 확신하는 공간이란 기껏해야 송파-잠실-삼성-강남구

청-압구정으로 이어지는 선 정도이다. 아무튼 지수양이 시키는 대로 시청역에 내려 보니 여기는 딴

세상. 신촌에서는 한 벌 보기도 힘든 정장들이 마구 지나다니고, 형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워 보이는

연배의 이들이 막내 취급을 받으며 일행에 앞서 길을 트며 걸어가는 모습. '이사님!', '과장님!', 마치

피난길인양 곳곳에서 큰 목소리로 불러제껴대는 직함들. 청바지에 패딩 잠바를 입고 있는 내가 별

종이었다. 늦게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에, 시청을 향해 가며 신촌에서부터 도착했다고 뻥문자를 보

냈건만 지수씨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오분 늦게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처음에는 오빠답게 어깨

라도 두드려 주며 그간 고생 많았어요, 허허, 등의 태도를 취할 작정이었던 나는 시청역의 가열찬

계단수와 적응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질려 있다가 지수씨의 얼굴을 보고는 으앙 하며 달려가 매달려

버렸다. 지수씨는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라는 듯한 허허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분 늦게 나타난 것에 새삼 분개할 정도로, 회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회사의 옥상을 찾아 2007

2학기 연다 페스티벌에 대해 담소를 나누던 지수양과 나는 밤 열시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 하고 엉

뚱한 위치의 하겐다즈를 찾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비싼 아이스크림 몇조각을 주워 먹었다. 지수씨

는 상냥한 얼굴로 피흘려 번 돈이니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건네 주었다.


본인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회사생활이 편했던 걸까, 한참 인턴 준비하고 면접 보러 다니던 지난

학기 말보다 훨씬 얼굴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사회생활의 영향인지 재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습윤함을 마음껏 함유하고 있었던 개그센스는 아마존 전투사의 창끝마냥 날카로워져 오랜만에 치

고 받는 대화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사람을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경은양의 초월적 센스에

는 당할 수 없지만, 반드시 한 구석이 비어 있어 치고 나가게 만드는 지수양과는 좋은 승부가 되어 즐

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사님이 찾는다며 황황히 가버린 지수양을 뒤로 하고, 우습게도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뭐야, 역에서 고작 오분 거리면서 늦다니, 하고 화를 냈던 것이 한시간도 안 지난 일인데.

그렇다고 서울 것들에게 길을 물어보기는 싫어 일단 걷기 시작하였다. 모퉁이를 돌자, 시청 앞 광장

에 루체비스타가 보였다. 아니, 이렇게 연결이 되다니! 백지 상에 지도가 그려지는 느낌이란 참으

로 짜릿한 것이다. 총총 걸음을 걷자 이내 조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조명 앞에 이르러 옛생각을 하며 잠시 추억에 젖어 있는데, 묘한 패션의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

라며 카메라를 건네 왔다. 이미 시간은 늦을대로 늦어 있었던 터라 마음껏 산책이나 할 요량이었던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팔을 똑바로 들어 카메라를 들자 연인 중의 남자는 '저, 밑에서 위로 찍

어 주시면 좋겠는데요.'라고 말했다. 팔을 조금 내리고 '이 정도요?'라고 묻자 '더', 배꼽 아래까지

내리고 다시 묻자 또 '더', 허, 그놈 참, 하며 무릎을 굽혀도 '더', 결국 나는 개구리처럼 주저앉아

사진을 찍어 주었다. 다시 카메라를 건네며 '확인해 보세요'라며 친절한 어투로 말했는데, 화면을

보는 연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예의상 건네었던 말일 뿐이지 그들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

던 나는 '만족하신 것을 보니 제 수고가 값을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냉큼 돌아섰다.


머리속 지도에서는 시청과 종로, 청계천이 연결되었다. 서울도 별 것 아니군, 하며 거대빌딩 사이를

자유로이 노니는데, 멀쩡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삼십대 가량의 두 회사원이, 수십대의 차량이 지나가

고 또 수백명의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서 고추를 떡하니 꺼내 놓고 소변을 보는 모습을 보았다. 인도

에서도 보지 못 했던 모습이라 어처구니없어 하며 흘끗거리며 지나쳤지만, 아마도 그 순간 내 무의식

속에는 남대문-시청-종로 지역에서의 회사생활에 대한 한 이미지가 각인되지 않았을까. 성실히 회사

생활하시는 분들에게야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어차피 이미지란 그런 것이니까.


자랑스럽게도,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정류장에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찾아내었다. 몸을 싣고 한참이

나 달리고 있는데, 겨우 이사님으로부터 풀려 났다는 지수양의 문자가 왔다. 열한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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