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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2

 

 

 

 

 

 

 

나는 대체로 끝도 없이 쫓기거나 내처 달리는 꿈을 자주 꾼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 활을 당기고 과녁을 맞추는

 

꿈을 자주 꾸게 됐다. 옛 기록을 뒤져 보니 대체로 길몽(夢)이라 하여 마음은 잘 놓아두고, 활은 누가 만들었을

 

까 궁금해 오랜만에 잡식 공부를 좀 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활을 처음에 만든 이는 옛적의 휘()라고 한다. 설문해자는 한자의 모양

 

과 음, 연원 등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인데, 오래 되기도 하였고 내용이 간략한 부분도 있어 이후로 여러 이가 각주

 

를 달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왕균(王筠)은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였다. “당서(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

 

)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호(少昊)씨의 다섯 번째 아들인 휘()가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

 

었다. 이에 장()이라는 성씨를 내렸다.’ 송충(宋忠)은 휘()가 황제(黃帝)의 신하라고 하였고, 광운(廣韻)

 

서는 헌원(軒轅)씨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순경자(孫卿子)는 수()가 활을 만들었다고 하고, 묵자(

 

)는 예(羿)가 만들었다고 하니, 설이 서로 같지 않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는 (羿)이다. 예는 고대 신화 속의 인물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

 

였는데,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견된 전한(前漢) 시대 죽간 본 손빈병법(孫臏兵法)세비(勢備)’편에 따르면,

 

(羿)가 궁()과 노()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예에게는 여러 가지 일화들이 딸려 있는데, 그 가운데 활솜씨에 관한 것으로는 회남자(淮南子본경훈(本經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눈에 띈다. “()임금이 예(羿)로 하여금 착치(鑿齒)를 주화(疇華)의 들판에서 죽이

 

, 구영(九嬰)을 흉수(凶水)에서 주살하며, 대풍(大風)을 청구(靑邱)의 못()에서 죽이고, 위로는 열 개의 태양

 

을 쏘며 아래로는 알유(猰貐)를 죽이게 하였다.”

 

 

 

주화, 흉수, 청구 등은 지명이고, 착치, 구영, 대풍, 알유 등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괴물이다. 앞의 세 괴수는

 

각각의 특징을 따 이름이 붙여져 있다. 착치(鑿齒)의 착은 끌, 치는 이빨이란 뜻으로 끌 모양의 이빨이 달린 괴수

 

이다. 구영(九嬰)의 구는 아홉, 영은 목걸이, 두르다, 라는 뜻으로 머리가 아홉 달린 괴물이고, 대풍(大風)은 커다

 

란 새로 한 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지상에 태풍이 불어닥쳤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알유(猰貐)는 짐승 이름 알, 짐승 이름 유로 글자가 각기 고유명사화 되어 있다. 기록에 따라 그 특징이 다른데,

 

용의 머리에 너구리의 몸이라는 것도 있고, 소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는 것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사

 

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예는 활솜씨로써 이러한 괴수들을 제압하였다.

 

 

 

좀 더 유명한 에피소드인 열 개의 태양을 쏜 이야기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천제(天帝)에게는 열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태양으로 변신해 교대로 지상에 떠올라 빛을 비추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하늘에 떠올라, 지상의 초목과 동물들이 타거나 말라죽게 되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요 임금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명사수인 예에게 부탁하여 태양을 쏘아서 떨어트리도록 하였다. (이 요청자는 기록에 따라 요 임금

 

이기도 하고 아버지인 천제 자신이기도 하다.) 부탁을 받은 예는 활을 쏘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한 발에 하나씩

 

맞추었다. 사람들이 보러 갔더니, 떨어진 태양은 세 발 달린 까마귀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동이족의 직계

 

조상으로 보는 설들이 있는데, 삼족오(三足烏)’ 상징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에는 하나의 태

 

양만이 남게 되었는데, 하나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예가 스스로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양이 모두 없어질

 

까 두려워한 요임금이 화살 하나를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들 한 명만은 살려 달라고 천제가 간청했다는 이

 

야기도 있다.

 

 

 

예는 생의 마지막도 드라마틱하게 장식하였다. 예의 죽음에 관한 가장 공식적인 기록은 맹자(孟子이루하(

 

婁下)에 보인다. “봉몽(逢蒙, 방몽이라고도 읽는다)은 예에게서 활쏘기를 배웠는데, 예의 도()를 다 배우고서

 

는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것은 오직 예뿐이라고 여겨 이에 그를 죽였다.” 살인의 방법에 대해, 야사에는 활로 쏘

 

아 죽였다고도 하고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도 한다. 복숭아나무라는 주장에는 몇 가지 설이 덧붙는

 

, 이 때 원한을 품은 예가 흉신(凶神)이 되어 돌아왔는데 복숭아나무 가지를 걸어둔 집에는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나, 이로부터 동아시아의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복숭아나무라는 민간신앙이 생겼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

 

 

 

활과는 관련 없지만, 예와 관련된 또 하나의 유명한 이야기는 항아(姮娥)와 관련된 것이다. 항아(姮娥)는 상아(

 

)라고도 부르는, 예의 아내이다. 언젠가 죽게 될 것에 생각이 미친 예는 곤륜산의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가 불

 

사의 약을 얻어왔는데, 아내인 항아가 이 약을 훔쳐 달로 도망가 버렸다. 그 동기에 관해, 예와 항아를 영웅적 능

 

력을 지닌 인간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불사에의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예와 항아가 본디 하늘의 신이었으나

 

열 개의 태양을 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보는 쪽에서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편의 사정 때문에 지상에

 

내려오게 된 천녀의 불만 탓이라고 대체로 해석하는 것 같다. 어느 쪽이든 항아는 남편에게서 무언가를 훔쳐왔

 

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달의 두꺼비로 변해버렸다는 결말은 동일하다. 굳이 두꺼비인 이유는, 중국 지역

 

에서 달을 보았을 때 보이는 크레이터들의 모양이 두꺼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달과 관련

 

된 동화들에 주로 토끼가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항아는 달과 관련하여 중국의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2007년 발사된 중국 최초의 달 탐

 

사위성의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항아 1가 발사되던 해인 2007년에 수립되었던, 2010년을 목표로 한 달 표면

 

유인 착륙 프로젝트의 이름도 항아공정이었다. 항아공정의 목표는 이후 수정되어, 현재는 2013년 무인 착륙선

 

항아 3를 달로 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뻗어나가 마침내 천문학까지 가 닿은 것이 재미는 있었지만 소기의 목적에서 너무 멀리 가 버렸기 때

 

문에 오늘의 잡식 공부는 여기서 그만. 아무튼 잘 벼린 활 한 자루는 꼭 갖추어야겠다는 결심만 굳히고 다시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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