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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행운만발

어제의 만원 사건에 이어, 오늘은 시와 수필로 응모했던 공항가족 문예사진전의 우수에 당선되는

쾌보가 있었다. 다만 금상 한 명은 백만원, 은상 두명은 오십만원, 우수 열다섯명은 만원이라는 어처

구니 없는 낙차만이 마음에 걸릴 뿐.


사실 수필은 한사람이 여러개 응모해도 된다길래 대충 써 본다는 성격이 강했고, 시 부문에 한시를

쓰며 오랜만에 한시집까지 꺼내어 볼 정도로 좀 투구를 해 봤는데 엉뚱하게 당선은 수필이 됐다.

이런 대회라면 으레 한시 하나쯤 구색 맞춰서 뽑기 마련이라는 내 필승의 전략이 먹히지 않아서

좀 아쉬웠다. 감을 잃은 것인가, 크고 작은 문예대회에서 이런 식으로 항상 작은 건 챙겨 먹었었는데

말이야. 내용은 공항 개항 5주년에 맞춰서 내는 것인만큼 공항 용비어천가였던 탓에 차마 부끄러워

싣지 못 한다. 김작가의 고뇌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달까.


며칠 전부터 삐걱삐걱대던 컴퓨터가 드디어 고장났다. 알씨 몇번만 돌려도 재부팅해야 하는 걸

감수하며 써 주고 있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이 버릇 없는 놈이. 수리를 맡긴 동안 텅 빈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뭘 하나 힘이 쭉 빠져 있었는데 기획수사계에서 연락이 왔다. 이전에 택시요금으로 시비

가 은 외국인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해 줬던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던 한 반장이 번역을

맡겨 온 것이다. FBI와 연계조사한 피의자가 오늘 오후에 입국하는데, FBI가 영어로 조서와 수사 자

료를 보내 왔다고 이런 버릇없는 놈들을 봤냐며 기획수사계장님은 화를 버럭버럭 내고 있었다. 그러

고 보니 버릇없는 것 같기도 하고 괜스리 옆에 있다 넌 왜 제복 다림질이 그 따위냐고 갑자기 시비

를 거는 통에 나는 열심히 해 보겠다고 자료를 확 채어서 총총걸을 쳤다.


만만하게 봤던 번역 열댓장은 결국 네시간이나 걸려 끝을 볼 수 있었다. 내용은 나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로 슬픈 여인의 이야기였는데, 아무튼 길어서 다음으로 넘기고, 헐떡헐떡 뛰어서 기획수사계에

번역본을 넘겨 주고 쓰러져 버린 내 뒤로 국제적 범인의 입국을 한시간 남겨 놓고 드디어 조서와 수

사 자료를 인계받은 기획수사계에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수고했다고 2만원을 쥐어 줬다.


사회에서 이런 일을 맡을 수 있는 고급인력도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맡았더라면 분량을 감안할 때

에 최소한 십만원에서 십오만원은 받았을 것이다. 내용도 양놈들 글답지 않게 외교 및 경찰전문용어

가 남발되는 탓에 결코 낮은 난이도라고 할 수 없었고, 시간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입대한 이후 처음으로, 그러니까 최소한 1년 반만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했다, 무언가 세계

에 도움을 주었다, 라는 느낌을 받고 그 2만원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사실 대원한테는 안 줘도 그만이

다. 반드시 번역비를 지불하게 되어 있는 규정은 직원용이라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되는 건데 워낙에

큰 걱정을 하고 있다가 한시름 놓은 수사계 직원이 붕 뜬 김에 준 것이라 생각한 나는 다시 종종걸

음을 쳤다. 여러번 뛰는군, 체신머리 없게.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쳤다.


사무실로 돌아오기만 하면 오늘 하루는 끝. 갑자기 뒤에서 경무계 직원이 불러 철렁했다. 경무계

에서 날 부를 때에는 단일심부름으로는 최장거리가 소요되는 우체국 심부름이 대부분인 탓에 긴장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직원은 네 생각 다 안다는 듯 씩 웃으며 편지를 건네 주었다. 너 바쁜 것 같아

서 내가 우체국 다녀 왔는데, 왔더라.


받아본 편지는 기다리던 교토 통신. 행운만발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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