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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학알

학알 이야기를 하기 전에, 며칠 전의 짧은 일화를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인천에서 과외수업을 하는 아이의 집은 연수구 동춘동에 있다. 타지역 분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지만 이 연수구라는 지역이 인천 내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란 대단히 특이한 것으로 감히 비교할

대상을 찾을 수 없다. 인천이 미추홀으로 불릴 무렵에는 아직 바다였던 곳으로, 이후 계속해서

이루어진 간척사업등을 통하여 마침내 땅이 되고 서울 내 인구가 주변지역으로 퍼져 나가며, 인천

자체로도 광역시로의 승격을 꾀하여야 할만큼 비대해진 무렵에 새로이 주거지역으로서의 가능성을

평가받아 개발된, 말하자면 하우스 타운이다. 올-하우스 타운. 달려도 달려도 오로지 아파트뿐이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길을 잃기 일쑤다. 인천에서 가장 큰 구 안에, 풍림, 현대, 삼성 등 몇개 되

지 않는 아파트 브랜드들이 잔뜩 몰려 있으므로 편의상 '1단지' '2단지'등으로 분류하는데, 심한 경

우 단지 넘버는 두개 차이나는 것들이 버스정류장으로 다섯개이상 떨어져 있는 곳도 있는 것이다.

경기도 내에서는 그다지 귀한 풍경이 아닐 것이로되 인천에서는 오로지 그 한 구만이 통째로 특이하

기에 잡학강의 삼아 늘어놓아 보았다. 어쨌든 일화와는 관계없다.


그런 연수구에서 과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탔다. 잔돈이 없어 천원짜리를 내고

퉁퉁퉁 떨어진 삼백원을 주워 들고는 의자에 앉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기사아저씨가 소리를

꽥 질렀다.

'잠깐!'

나는 겁이 많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편이다. 귀신의 집등, 공포를 조장

하는 유흥시설에서 나온 뒤 나는 반드시 입술을 마사지해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꽉 물고

있었던 그 부분이 다음날 아침에 보라색으로 변색되기 때문이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여하튼 그 정도로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나인데, 눈이 휘둥그레 커질 정도로 아저씨

가 깜짝 놀래킨 것이다.

'왜. 왜요?'

아저씨는 탁한 눈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 보았다. 경찰이라면 나를 간첩으로 의심하는가 생각할

터이고 뚜쟁이라면 신랑점수를 매기는가 생각하겠지만 상대는 버스 운전사,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러는가 슬슬 더 무서워지기 시작할 그 무렵에,


아아, 위대한 버스 운전사님은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앞을 보며 한 손으로


퉁.


퉁.


이백원을 더 거슬러 주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버스운전사 아저씨가 날 고등학생으로 알았다는 이야기. 자 그 얘긴 끝. 그럼 학알 이야

기를 하자.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이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그러므로 학알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본디 학알이라 하면 조류에 속하는 학, 그 학이 낳는 알을 가리키는 말이

지만, 보통 학알을 접는다 하면 중지 하나 정도 길이-너비의 종이를 접어 육면체의 입체를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그 학알인 것이다.


처음 학알을 접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차근차근 접어나가 후루룩 풀었다가 다시

딱딱 아귀가 맞게 끼워 나가는 그 단순반복행위에 매력을 느낀 나는 중학교 3년 내 시간이 날 때마다

붙잡고 앉아 종래에는 만개까지 접을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종이쪼가리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신

분은 이 만개라는 숫자가 그 추상적인 이미지에 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끈기를 요구하는지 잘 아실

터. 끝내 만개를 채우고 큰 유리병에 담아둔 뒤 그 후로는 이따금 생각이 나면 삼사십개 정도 접어

두는 데에 그쳤지만. 그렇게 접은 학알은 돈이 없을 때마다 유용한 생일선물로 쓰이기도 하고 친척

꼬마들이 비싼 장난감을 달라고 조를 때마다 훌륭한 유인책-대체물로 쓰이기도 하다가 칠천여개정

도가 남았을 때 몽땅 첫사랑의 그녀에게 가버렸다. 정확히는 칠천개가 약간 넘는 수라 다시 몇

백개를 더 접어 칠천칠백칠십칠개를 주었던 것으로 추억한다. 그 학알을 다시 접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접고 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 이것은 고등학교 당시의 주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이다. 생각을 하고 보니 학알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라 적고 넘어간다.


잘 알다시피 나는 이십년을 꼬박 인천에서 채운 인천 토박이이다. 인천의 권력은 소수의 경상도 출신

들이 잡고 있으되 그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구성원은 박정희정권부터의 심화된 지역차별 탓에 일자

리를 찾아 몰려든 충청권과 전라권의 사람들. (그래서 나는 수도권 사람인데도 말에 억양이 약간 있

다.) 거기에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인천의 정통 토박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정도이다.

내 고향 인천은 흐르는 별 삼미슈퍼스타즈를 배출한 구도(球都), 남한 제 2의 항만도시,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그리고 시도학력 꼴찌를 면하지 못 하는 비운의 도시. 오죽하면 EBS라디오방송이

'온누리의 배움터'라는 시그널 송을 내보내지만, 인천지역에는 EBS인천지부가 따로 있어 얼핏 들

으면 온누리의 배움터라 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돌머리의 배움터'라는 노래를 내보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인천. 그러므로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인 1993년에는 국민학교 영어교과서란 없

었고 조기교육이란 건어물 구별법을 가르치는 것인가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다행히도 영어 조기교육을 받게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첫사랑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었

다. 여차저차의 사정으로 중학교 3학년때의 대쉬는 실패로 끝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영어만을

공부할 수는 없다고 반이 해체되는 바람에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막연히 그리기만 하며 3년이 흘

렀다. 그리고 때는 1999년, 장소는 인천시 영어경시대회 대회장. 운명의 신의 장난스런 손길.

나는 학익고, 그녀는 학익여고.

가나다순으로 학교별 대표들을 배치해 놓은 그 곳에서 당연히 우리는 교실 맨 끝의 앞자리 뒷자리.

여성의 외모에 대한 내 시선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심히 편벽된 상태로 변하지 않아, 고등학교 3년

에 진급하여 나름대로 마음을 잡는다고 잡았으나 풍운의 주안 삼진 시절을 끝낸지 얼마 안 된 최대

호는 뒷자리에 앉은 아리따운 여성에게 말을 걸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모르는 예쁜 여자라고 생

각한 것이지. 말투도 따악 수작조로. 교실앞에 뻔히 댑따 큰 시계 있는데도 저, 몇시죠? 하고.


그러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 아, 그녀로구나, 중간의 3년은 존재하지 않았던듯, 교실을 꽉 채운 다른

이들은 모두 그 순간 오로지 그녀만이 보이는 나에게 무시받기 위해 태어나 십수년을 살아온 것처

럼, 영화의 일은 영화적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구나라는 생각은 홈런으로 저 멀리 날아간다. 내게도

영화가. 이렇게 생생한 영화가.


다시 여차저차해서 사귀게 되었다는 뻔한 이야기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는 다같이 치워 두자.

이번엔 학교 이야기를 해 보자. 학익고다.


나는 학익고등학교 2회 졸업생이다. 신흥학교들이 대개 그렇듯 향학열에 불타는 교사와 학생들의

의지가 작렬하여 모두가 놀랄만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초기의 그 몇년, 그때의 가운데에 1회와 우리

2회가 있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한해에 서울대에 진학시키는 학생수

가 열명을 넘는 학교는 거의 없는 인천소재의 고등학교답지 않게 갖은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전교 200등까지의 성적을 로비에 게시하는가 하면 특별반 수업을 밤까지 하기도 했고, 전교 이십등까

지만 따로이 쓸 수 있는 독서실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문과이과 공동이므로 각각 이십등씩 사십

명. 큰 이인용 사무책상을 혼자 쓸 수 있고 냉난방은 언제나 완벽한 그 곳. 성실한 학생의 천국.


하필 그 곳이 우리 연애의 적신호가 된 것이다.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 본 7월 모의고사에서 나는 이

십일등을 받아 고등학교 3년 생활 중 처음으로 그 독서실에서 떨어졌다. 교실에서의 생활은 즐거웠

다. 반아이들과 떠들다가 단체기합을 받기도 하고, 야자를 째다가 담에 걸려 바지가 찢어진 것도

모르고 노래방에 가서 합방한 여학생들에게 지적을 받아 기겁하기도 하는 등 나름으로는 즐거운 생

활이었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자기때문에 내 공부가 방해되는 것은 싫다며 수능이 끝나고 만나자고

하였다. 일주일에 두번 만나는 것에도 애가 타 죽을 것 같던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그녀는 한참

이나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밀었다.


일등에서 오등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겠다. 육등에서 십등까지 올라가면 시키지 않아도

매일 뽀뽀를 해 주마. 십일등에서 십오등까지 올라가면 가슴을 만져보게 해 주마.


오오. 나의 여신이여.


고백하건대, 나는 이 날까지 살아오며 공부에 매진하여 코피를 흘린 경험이 단 두번 있었다. 재수생

활 중 부실한 식생활과 무리한 스케줄 관리탓에 어쩔 수 없이 흘렀던 그 때. 그리고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렸던 1999년 8월의 어느날. 열아홉 건장한 육체가 코피를 쏟아낼 정도로 나의 의지는

태산처럼 굳건했다.


그리고 8월 대성 모의고사. 놀라지 마시라. 나는 중학교 입학 이래로 처음, 전교 1등을 했다. 가채점

결과를 확인했을 때와 성적표가 나왔을 때,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때도 물론 그때까지의 인생

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 중 하나였지만 역시 그녀를 만나러 달려가는 순간만큼은 못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건은 일등부터 십오등의 상승까지였으므로, 나는 이십일등에서 일등으로 올라

간 이십등 상승의 케이스였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어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유를 알 수 없는 이별을 통고받았던 것이지만.



학알에서 첫사랑, 첫사랑에서 가슴으로 사고가 종횡무진 뛰는 통에 글이 너무 길어진다 싶었는데

열아홉의 여름, 그녀의 향기가 기억이 나는 시점에서 아련해지는 바람에 일단 멈췄다.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하나의 일기로 묶기엔 너무 커지므로 일단 오늘의 일기는 여기에서 퇴고도 하지 않고

접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학알 이야기. 언젠가 다시 만날 그녀를 위해 3년간이나 접던 물건을 다시

접으며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 다른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학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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