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8

편지

군에 있을 때만큼은 못 되지만, 여전히 나는 종종 편지를 쓴다. 받을 사람이 보고 싶어 쓰는 편지도

있고 비가 오거나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에 쓰는 편지도 있고, -이십대 초반의 최대호가 들으면 어

처구니 없어 하겠지마는- 전하고 싶은 바를 말로 하기가 어려워 쓰는 편지도 있다. 예전에는 열 통

을 쓰면 부칠 수 있는 것이 아홉 통이었는데 이제는 반도 안 된다. 이미 소식이 끊긴 사람에, 편지를

전해 봐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 편지라고 써 놓았는데 편지같지 않은 편지에, 이유는

점점 늘어만 간다.


군에 있을 때 받던 편지들에는 주로 연세대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 글자가 마음에 들어 몇

번이고 쓰다듬어 보던 기억이 있어, 만나서 직접 전할 것이 아니라면 등굣길에 백양로 한켠의 우체통

에서 멈추어 굳이 인천에서부터 가지고 올라간 편지를 천천히 밀어 넣는다. 올라가는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꺼내 보며 눈에 익었던 편지가 우체통 안으로 툭 하고 사라지는 아침에는 기분이 좋다. 학생들

이 적고, 청량한 바람이 불고 있다면 적게 자고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기분을 비할 데가 없다.


그러던 것이 학교에 가지 못 하거나 가더라도 정신없이 수업만 듣고 내려오게 되는 통에 편지가 제법

쌓였다. 개중 다음 주의 화요일까지 가 닿으면 좋은 편지가 눈에 띄어 토요일이었던 어제 오후 백화점

에 장 보러 가는 길에 부쳐야지, 하고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사실 장거리도 별로 중요한 것은 없었으

니 편지를 부치러 나간 것인데 이런저런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가 돌아오는 집 앞에서야 생각이 났다.

이것 참, 요새 정신이 없긴 없구나 하고 중얼중얼거리며 동네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이십여 분을 헤매었는데도 우체통은 눈에 띄질 않았다. 종국에는 좀처럼 가지 않던 집 근처 여중학교

앞까지 갔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 앞에는 구두방도 있고, 전화 부스도 있고, 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사이 어딘가쯤에 우체통이 있는 것이 머릿속 풍경이었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었

던 것인데 거기에서까지 찾지 못 하자 무척 속이 상했다.


다 써 두었던 것인데 며칠만 미리 부쳤더라면 인천에서 부치더라도 때에 맞춰 가 닿았을 것을. 그러고

보니 우체통이 이렇게 없어진 것도 통신문화가 발달한 시대의 한 단상인가. 집에 가서 네이버를 검색

해설랑 전국적으로 우체통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었는가를 조사해 보자. 나중에 아날로그 문화에의

향수를 쓸 때에 인용하도록 하자.


따위의 말을 중얼중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 우리 동네 쪽으로 가는 길을 택하던 나는 무심코 고

개를 돌렸다가 풍,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실소를 지었다. 방금 건너온 길의 구두방과 전화 부스 사

이에 우체통이 얌전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강 안에 있으면 흐름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오래 전부

터 인용해 오던 말인데 이렇게 유치하게 물리적으로 들어맞는 경우가 있나 그래.


횡단보도를 도로 건너 막상 우체통에 가 보니 평일 14시에만 수거한다는 안내문이 써져 있었다. 인천

에서 월요일 14시에 수거되면 서울 마포구에 화요일까지 가 닿는다는 예측을 하기가 어려워 그냥 월

요일 아침에 서울에서 넣기로 하고 편지는 도로 가지고 왔다. 나간 목적이 흐려졌지만 우체통 찾은

재미가 있어 싱글거리며 집 쪽으로 걸어 오는데, 매일같이 지나가면서 한 번도 못 봤으니 여기엔 없

겠지 싶어 처음부터 가지 않았던 아파트 정문에 우체통이 떡 서 있었다. 구두방과 전화부스 사이에.

'일기장 > 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 16일 수요일. 시청에서 재령과 수와.  (1) 2008.04.21
잡상雜想  (1) 2008.04.21
오오카미  (4) 2008.04.08
사월  (4) 2008.04.01
김치찌개  (1) 2008.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