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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춘희야, 빨간옷도 잘 어울려





우리동네에 있는 만화가게에서는 만화책을 200원에 빌려준다. 권당 400원인 신촌의 딱 반값이라

인천집으로 들어 올 때에는 항상 열권정도를 빌린다.


소파에 누워서 보기도 하고 음식을 먹으며 보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때는 가족들이 다 잠든

새벽에 침대에 배를 대고 엎드려 읽을 때와, 뜨거운 물에 우유를 부어 놓고 몸을 담근 채로 읽을 때

이다. 오늘은 어쩐지 날씨가 꿀꿀해서 때목욕이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지난번에 사 두었던 고무오리인형들을 띄워놓고 있자니 그 녀석들이 자꾸 욕조 밖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주우려고 하다가 만화책 한 권을 그만 물속에 퐁당하고 말았다. 너무 흠뻑 젖어서 식겁한 나

머지 남은 만화책은 목욕을 다 끝내고 나서 읽기로 했다. 할 일이 없어서 오리들을 툭툭 치며

천장을 보고 있는데, 왜 비오는 날 때목욕이 하고 싶어졌는지가 기억났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가 비오는 날 때목욕을 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목욕을 끝내고 나와서 장을 온통 뒤졌다. 한때 비디오 복사하기가 취미였던 적이 있어서 그 맘때까

지 나왔던 비디오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몽땅 복사해 놓은 탓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걸

려서야 찾았다. 따로 제목을 써 놓지 않고 EBS일어회화 테이프에 녹화해 둔 것을 깜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98년의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안의 중앙극장. 보고 나서

춘희가 얼마나 예뻤는지 같이 보러 간 애가 꼴도 보기 싫어져 바쁜 일 있다고 그러고 집으로 바로

들어왔던 일도 기억나 꺽꺽 웃었다. 추억이니까 웃으면서 보겠거니, 했는데 웬걸, 다시 춘희한테 감

정이입해 버려서 예전 짐들을 또 뒤졌다. 그 맘때쯤에 춘희한테 반해서 엽서니 공책이니 교과서

포장지니 온통 춘희로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뒤져 보니 깜빡 잊고 있었던 열쇠고리까

지 있었다. 하하, 세상에.


나는 같은 감독의 영화 <집으로>보다는 이 영화쪽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이다. 대사들이 연극적이기

도 하고, 화면도 아름답고, 무엇보다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요새 내가 한참 하고 있었던 생각들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뜻은 몰랐던 대사들로 툭툭 튀어

나와 그 선호의 폭이 더 커졌다.


글쎄, 영화 보면서 계속 생각했는데 난 동물원 깊숙히 있다가 요새는 어쩐지 미술관쪽으로 온 듯한

기분이다. 20대 중반, 인가.


어쨌든, 춘희가 말하기를

'때목욕을 하고 나면, 한달치 식량을 쌓아 놓은 것처럼 든든해!'

랬다. 그렇게, 내일부터 다시 든든한 일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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