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일지

지미 볼리외,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 (미메시스. 2013, 11.)

 

 

 

 

위의 표지 그림은 벗겨내는 표지에 그려진 것일까?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앞표지에는 글자 하나 없이 그림

 

만이 있다. 깜깜한 벽을 배경으로 하여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을 남녀 주인공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

 

는 그림인데, 그 대담함과 색채의 아름다움에 반해 책장을 넘겨보게 됐다.

 

 

 

이 만화책의 작가는 캐나다인이다. 서양의 만화책을 읽을 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단절'의 느낌일 것이다. 개

 

별 컷에 들어간 수고는 흔하게 접하게 되는 일본 만화의 일반적인 컷에 비해 엄청난 수준의 것이고, 대사의 정

 

보량과 깊이 또한 현격하다. 하지만 덕분에 '만화책이라면 역시 휘릭휘릭 읽어나가는 재미'에 습관화된 처지로

 

서는 컷마다 멈춰 서서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이 단절감이 불편하다. 파격적인 구도나 아름다운 컷

 

이 다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서는 서양의 만화책을 좀처럼 사지 않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만화책은 컷의 세밀한 구성과 같은 서양 만화의 장점, 그리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일본 만화의 장점을

 

적절히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서양 만화 특유의 사변적인 대사의 흔적은 전편에 걸쳐 드러나지만, 과감하게 단순화된 인물 처리나 비교적 정

 

형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컷 구성 등에서는 일본 만화의 영향이 보인다.

 

 

 

스토리는 길지 않다.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자신을 관찰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가 의외의 성공을 거두어 감독은 예전에 호

 

텔로 쓰였던 적이 있는 교외의 옛 건물을 구입한다. 감독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친구 커플을 이 곳으로 초대한다.

 

 

건물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호텔로 쓰인 적이 있었던 만큼 각종 무대장치나 공연설비 등으로 가득한

 

이 곳은 네 명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들은 방종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사랑과 인생에 관한 솔직

 

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직접 배우가 되어 즉흥극을 상연해 보기도 하며, 옷을 비롯한 인간적 양식을 모두 벗

 

어던지고 숲과 호수를 날뛰며 누비고 다니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친구 커플은 도시로 돌아가고, 감독은 여자친

 

구에게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곳에 혼자 머무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유기적인 플롯을 기대하는 분에게라면 불쾌한 독서가 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상당 부분 작가의 개인적 경험

 

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서 오고가는 인생, 자아, 관계, 섹스 등에 관한 사유 또한 다소 주관적인 것이

 

라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채로 넘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몹시 즐겁게 독서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림의 힘' 덕분일 것이다. 위의 그림은 출판사에

 

서 제공하는 몇 장의 책소개 가운데 그나마 나은 것을 골라온 것인데, 이 책에는 펜과 색연필, 그리고 마커의 위

 

대함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 훨씬 멋진 기법들이 가득하다. 비오는 밤의 도시, 석양이 지는 바다, 암흑 같은 옛

 

건물 등의 '장면'이 매력적으로 그려진 부분도 적지 않고, 또 극단적으로 아이콘화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에

 

'즐거움', '두려움', '흥분', '광기'등의 '정서'가 날것처럼 선연하게 나타난 그림들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대뜸 재미있다고는 하기 어렵다. 하지만 개별 작품이 아니라 '이야기', '그림', '만화' 등의 주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거나 고민해 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아주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분량은 평범한 소

 

설책 한 권의 한 배 반 정도의 두께이고, 가격은 다소 비싼 듯한 16,800원이다. 성인용으로 구분된 것도 아니

 

고 인물들이 단순하게 표현된 터라 엄청 에로틱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노출과 섹스 신이 다수 등장하니 이 점도

 

감안하시면 좋겠다. 나는 만약 중고서점에서 만난다면 두 권 구입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