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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잘 지내고 있나요

어떻게 시작을 해야 멋지고 장엄할까 고민을 하다가, '누이여'라는 소박한 말로 시작했음에도 내용

이 절절했던 한 문인의 서간이 기억나 그저 평범하게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영화 '러브레터'에서도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자기와 닮은,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도 저

말로 시작했었지요. 그 때에는, 잘 정돈된 정원의 옆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찻잎이 장난

스레 표류하는 녹차잔 안을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고아, 한 느낌이라고 하면 잘 전달이 될까 모

르겠습니다. 제멋대로 만든 말입니다만.



여하튼, 잘 지내고 있나요.



요즘 당신의 일상은 어떠한가요. 난 문득 생경할 때가 있습니다. 스무살이 넘는 문턱에서부터 시작

되었던 가면놀이에, 정작 그 첫걸음이었던 스무살에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요. 연대생으로, 후배로,

선배로, 하루에도 하나씩 수많은 가면들이 생겨나 이제는 바꾸어 쓰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리곤 합니

다. 복잡하기도 해서, 이런 때 군대를 갔었어야 하는건데, 라고 생각하다가는 이내 그대로 돌파해 보

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고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무거운 얘기는 말고. 밥은 잘 먹고 있나요. 난 어쩐지 양이 줄어든 듯한 느낌이예요. 먹는 시간대나

먹는 양이 항상 불규칙한 탓일까, 혹은 며칠전 누군가와 밥먹으며 장난스레 말했듯이 요새 소화 윤

활제인 술을 쉬어서일까. 여하튼 걱정은 되면서도 막상 때가 되면 잘 챙겨먹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밥을 꼭 챙겨 먹고 있길 바래요. 꼬박꼬박, 식사 때마다 말이죠.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말이죠.



겨울이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당신은 치마를 좋아하지요.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여학생들은,

스타킹이라는 것이 신어 보면 꽤 따뜻하다고, 지나가는 짧은 치마의 여자를 보며 걱정하는 내게 핀잔

을 주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바지보다 치마가 열 배가 좋은 것은 내

취향인지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혹여나 -기쁘게도- 당신도 아직 치마를 좋아하신다면

긴 치마를 입어 주세요. 주름이 없는 것으로.



요새 나는 눈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눈이 낮아졌다, 라는 속된 표현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러나 '눈이 낮아지는' 행위 자체가 속된 것이므로 딱히 평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도 현

실입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언제나 운이 좋아 예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 뿐 내가 눈이 높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렇고 저런 탓에 잠시만 앉아 있어도 예쁘

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하나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으면 단

하나의 모습으로 눈을 채우던 때가(흣, 때'들'이) 생각나 조금 아쉽습니다.



나는 보지 않는 TV를 켜 놓고, 나즈막한 재즈의 베이스 선율을 들으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번 편지를 썼을 때보다 두살을 더 먹었고, 수염이 자라는 속도도 조금은 더 빨라졌습니다. 그동

안 내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두번 왔다 갔고, 머리는 어깨까지 왔다가 움출움출했다가 짧

게 바짝 섰다가 수난을 겪었습니다. 머릿속과 입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당신도 변해 가고 있을까요. 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당신이 좋은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년 이 무렵에는 이 편지를 쓰지 않게 되기를. 다시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2년 전에도 그렇게 바랬었지만, 어쩌다 보니

올해 12월에 이렇게 또 쓰게 되었네요. 내일은 춥다는군요. 일찌감치 따뜻한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 푹 자요, 얼굴도 모르는 내 언젠가의 여자친구.



...지난 번 편지보다는 문학성이나 구성이 많이 떨어지죠?  글은 세월을 밟고 올라간다고 누가 그랬

었는데, 다음에 만나면 한 대 때려 줘야겠습니다.


                                                                            
                                                                                                2002 . 12. 1. 일.  崔大鎬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웃음이 키득 나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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