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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잃어버린 것

mp3를 잃어 버렸다.


저녁 시간부터 시작한 조모임의 장소를 몇차례나 옮긴 뒤였다. 중앙도서관의 세미나실은 사람들로

꽉 들어찬데다 너무 시끄러웠고, 학생회관의 식당들도 여섯시 반을 넘기자 문을 닫아 버렸다. 조용한

곳에서 논의를 빨리 마무리짓고 싶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신촌의 커피숍을 택하여 학교에서 내려

왔던 것이다.


아늑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조모임은 한 시간 정도만에 끝났다. 조원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며 지인과 오분여간 통화를 한 뒤 음악을 듣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때 mp3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물건들을 놓는 장소를 습관적으로 정해놓고 거의 어기

지 않기 때문에, 물건들이 정해진 장소에 없는 경우는 십중팔구 잃어버린 것이다. 살면서 몇차례 되

지 않는 그 철렁함이 다시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탈탈 뒤집었지만 mp3는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학교는 다시 올라가봐야 소용이 없었다. 방금 나온 커피숍이라도 다시 가 봐

야지 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고작해야 오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막 떠났던 자리에는 한 여학생이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시 이 근처에서 떨어진 mp3

못 봤습니까, 라는 나의 질문에 여학생은 잠시 눈을 들어 글쎄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학생의 앞자리에는 동행들이 잠시 주문이라도 하러 간 모양인지 가방들이 놓여져

있었다.


아홉시가 넘은지 오래 되었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홍기가 신설동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이 등교하여 수업까지 빠져 가며 전날 갔었던

장소들을 모두 뒤졌지만 결국 mp3는 나오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을 잃어 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 사

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엉뚱한 사실을 안 것만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6기가의 대용량을 거의 다 채운 노래들을 다시 다운받는 것도 고역일테고, 다 생각이 날리 없으니

몇몇 노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쓸쓸한 것은 그냥 돈

주고 툭 산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이먹어 입대했고 동기도 없는데다 후임까지 늦게 받은 내게 군생활 중의 유일한 낙은 언젠가 음

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희망 뿐이었다. mp3를 들을 수 있는 자체기준인 상경진급을 바로

눈 앞에 둔 며칠 전, 당시 만나던 연인이 돈을 모아 사 준 것이 바로 그 물건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전부의 군생활과 인도여행, 그리고 고되었던 복학생활 내내 함께 해 주었던 것까지 더해 보면, 이전의

어떤 물건들보다 그 떠나보낸 쓸쓸함이 더 했다. 인도에까지 입고 다녀온 후드티를 술먹고 잃어 버

린지 일주일도 안 된 차였다.


축 처진 채로 다시 조모임에 가서 내 안색을 살피고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 보는 조원들에게 자초

지종을 이야기하는데, 한 조원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생긴 mp3가 아니냐며 정확한 외양을 설명해 왔

다. 대경실색하여 어디서 보았는지를 묻자 조원은 어제 커피숍에서 일어날 때 옷을 벗어두었던 곳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는 말을 했다. 조모임을 어떻게 마친지도 모르고 나는 커피숍

으로 달려갔다.


그렇군, 주문을 하러 간 아가씨들이 챙겨두었던 것이군. 카운터에 있겠지. 에이, 조금만 더 기다렸다

가 그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했더라면 하룻밤 속상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러나 mp3는 없었다. 적어도 어떻게 잃어 버렸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지금은 그리 좋은 모델도 아닌데. 신촌의 상권에서 커피를 사 마실 수 있는 경제력의 사람들이

어댑터가 딸린 것도 아닌 mp3를 왜 가져갔을까. 나는 조금,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만나던 사람과 헤어진 것도 어느덧 열달이 다 되어간다. 날을 세고 있다는 것부터가 아직 마음에 미

련이 남아있다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시간에 치여 조금씩 같은 속도로 잊어가며 편해지고 있었는데,

그리고 근래에는 마침내 편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조금씩 잊고 있었는데, 큰 계기를 만나 아직도

온전한 한 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됐다. 바로 며칠 전 물건을 잃어버린 것보다

오래 전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어찌 이리 더 속상한 일일까. 할 수 있다면 mp3를 가져간 사람에게

두배의 돈을 더 치루고라도 찾아오고, 기억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열배의 돈을 치루고라도 잃어버렸던

기억을 지워달라 부탁하고 싶다.


통학시간이 긴 탓에 새 mp3를 구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는데, 저렴한 가격

과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늘어서 있는데도 내 손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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