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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이사

이사를 간다.


학교 앞에서 학교선배(오래 같이 사니까 이제는 사실 학교선배라는 느낌도 크지 않다. 아주 오래 전

부터 알고 지낸 친척 삼촌같은 느낌이랄까. 으힛. 정훈이형, 미안요. 이유없는 반항이 청소년기의

특징이라니까요.)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사실상 방값의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는 형이 이사를 결정

하셔서 쫄랑쫄랑 따라가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사실상 가장 가까운 주거지역에 살다가 조금 먼

곳으로 가게 되어 아주 약간 귀찮을 법 하다고 생각해 보지만, 어쩐지 버스로 등교하고 하는 것이

먼 옛날의 일이었던 것만 같아 약간 설레이는 마음도 있다. 왜, 그런 얘기도 있잖은가. 18세 꿈많은

여고생, 매일 아침 버스를 같이 타는 이름모를 명문대 대학생의 책읽는 옆모습에 반해 편지를 주고

후다닥 도망간다는...

(...물론 봉투안에 '무이자 대출'이나 '우주의 가을이 오고 있다' 이런 게 들어 있으면 우울하겠지만.)



내일 떠나야 하므로 짐은 반 정도 포장되어 구석에 쌓여 있다. 재수 때 하도 집을 옮겨 다녀 이제

이사가 갖는 애상감 같은 것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반년이 넘게 먹고 자던 곳이니 나중에

보고 싶어질 것을 미리 걱정하여 한 곳 한 곳 자세히 둘러본다.



1학년 때부터 세어 보면,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잠자리로서 정이 들었던 곳이 벌써 세 곳이다.

작년 2학기 때 혼자 살던 곳도 참, 좋았는데. 그 전의 장소는 여러 사람이 지나는 이 곳에서 차마 밝

히기 뭣 하지만, 거기도 좋거나 재미있는 기억들이 많았고. 여기도 나름대로 기억들이 많았다.

한 장소를 떠나며 어떻게 살았던가를 반추해 보다가 기어이 울고야 말았던 스무살의 이사들을 생각

해 보면, 고마웠어, 안녕, 하고 즐겁게 떠날 수 있는 이 방은 괜찮은 곳이었다. 내년 1학기도 다니게

생겼으니, 지나가다가 문득문득 올라가 보고 싶을테지. 아하하. 뭐, 여하튼, 약간의 애상감과 새 장

소에의 상상으로 나온 즐거움이 섞여 꽤 괜찮은 기분이다.



들어 보시라. The foundations-Build me up buttercup. 오스틴 파워나 아메리칸 파이류를 좋아

하여 비디오를 복사하고 보시는 분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인상적인 엔딩곡으로, TV

를 자주 보시는 분들은 이병헌씨가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엽게 도너츠를 먹던 CF의 배경

음악으로 익숙한 곡일 것이다. 지금 이 일기를 쓰는 내 기분과 아주 흡사하다. 기분을 잘 표현해 줄

만한 사진이 없어 음악으로 대신한다. 문득 쳐다본 거울에서 아주 기분좋게 웃고 있는 얼굴이 비

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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