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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요새는

보통 아침 여덟시에서 열시 사이에 잔다. 날씨가 좋으면 산책을 다녀와서 열두시 무렵에 자는 일도

있다. 그야말로 천하한량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 가운데.


도대체 밤에 뭘하나요, 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그러게, 뭐하지, 하고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

한 것은 없다. 책읽고, 오락하고, 퍼즐을 맞추거나 (수십개 사다 놓은) 비디오를 보거나 한다. 가끔

음악을 듣다가 기분이 좋으면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보내는 것이 귀찮아 대부분 그저 쌓아둔다.


앉은 자리에서 하나의 활동만을 하며 열시간을 넘기곤 하는 것은 사실 재수때 몸에 붙은 습관이다.

고등학교때의 나는, 뭐랄까, 재간꾼이었다. 나름으로는 노력한다지만 정말로 노력하는 친구들이

보기에는 별 노력 없이 점수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기 일쑤였던 모양이다. 잔재주는 있어도 기본이

없었달까. 그러나 고생스러웠던 재수생활을 보내며 죽어도 삼수는 못 하겠다는 공포심이 들어,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다. '빨'이 오르기 시작하면 자리

를 뜨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은. 지금은 별 빨이 없어도 그냥 몇시간씩 하던걸 한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 흥이 깨진다. 한참 어두운 시간이라야 뭐든지 재미난데, 요새 가장 재미

있는 것은 쓰고 있는 연극대본을 혼자 연기해 보는 것이다. 거기에 조명, 무대, 음악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가히 엑스터시의 세계에 이른다. 입에서는 '야, 넌 천재야, 넌 천재야!'가 연방 튀어나온다.

인생의 반도 지나지 않았지만(않았겠지만, 부디) 감히 평가하자면 내가 타고난 최고의 재주는 나를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난 내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도무지 그 기분을 멈출 요량이 없다.


살아오면서 고난을 부른 것도 복을 부른 것도 모두 그 탓이었으니, 특별히 근황을 쓰고자 했던

제목 '요새는'이 무색해졌다. 그래도 어쨌든 난 내가 좋으니 어쩔 수 없다. 요새는 내가 더 좋다,

라고 하면 조금 말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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