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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열심히 살아 주십시오

날씨는 어제부터 심상치 않았다. 지인과 전화를 하던 중 바람이라도 잠시 쐴까 하고 창문을 열었는데

큰 바람이 훅, 하고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중간고사 공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읽고 싶

던 책들을 잔뜩 쌓아 놓고는 침대로 뛰어 들었다.


비오는 날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도 각별하지마는, 지난 겨울이 끝날

때쯤 엄마가 내 방 창문의 커텐을 걷어버린 탓에 요새는 쭉 잘 수 있는 시간이 생겨도 빛 때문에

깨는 일이 잦았었던 터라 더욱 유별했다. 마음껏 책을 읽은 뒤 눅눅한 암회색의 방 안에서 깨어나는

것은 과연 천금의 가치가 있었다.


더 누워 있을 수도 있었지만 바람소리가 워낙에 셌던 탓에 부슬부슬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손바닥을

쳐다 보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몇달째, 휴대폰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던져놓고 쳐다보지 않는 습관

이 생긴 탓에 반짝반짝하고 화면이 빛나는 그 모양새는 옷을 제하고는 분명 하루 중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붙어 지내는 내 물건임에도 생경했다. 별 생각없이 확인한 그 문자는 KTF의 요금수납 독촉

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몇차례인가 비슷한 문자를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오늘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정지한다는 말에 어마 뜨거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KTF114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 보니,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인천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번화한 곳임

에도 납부할 수 있는 곳이 근처에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상담원이 가르쳐 준 곳은 버스로 약

세 정거장 거리. 응, 그래? 슬슬 걸어가 볼까? 하며 순순히 나서는 자신이 놀라웠다. 바람은 점점

더 크게 불고 있었고, 비를 맞추고서 빨래감으로 내어 놓을 수 있는 바지들은 대체로 바닥에 끌리

는 것들 뿐이라 짜증을 낼 만한 거리는 몇개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있거나 말거나

몸은 백치처럼 휭휭 문을 나섰다.


어제 한 후배로부터 옛 노래들을 한움큼 받아다가 mp3에 쟁여 놓은 차였다. 아주 가까운 지인들만

아시는 습관이지만,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래들에 전혀 맞지 않는 화음을

붙이며 스스로 만족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 천성이 빛을 발했다. 안 맞는 걸 알면서도 귀에는 어찌나

좋게 들리던지, 허, 그것 참, 노래 잘한다, 하고 연방 탄성을 내어가다 금세 다시 화음을 붙이며 하다

보니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대리점을 지키고 있던 대머리 사장님은 턱을 괴고선 비오는데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까 하는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종업원도 하나 없이 심심했던 모양인지 내가 들어서자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 주던 사장님은 요금수납을 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탕수육 얼굴로 돌아가 버렸

다. 밀린 지난달치와 이번달치를 합쳐서도 낼 수 있만 일단 지난달치만 내면 정지는 막을 수 있다

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요금의 끝자리는 60원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걸 반올림하고는 40원을 거슬

러 주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따져볼까 하다가 사장님이 다시 턱을 괴어 버리

는 것을 보고는 돌아서서 나왔다.


바지는 치덕치덕하고 추울까봐 껴입은 웃옷들 탓에 앞섬 사이로 더운 김이 올라와 턱이 간질간질

했다. 그런데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여러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동네로 돌아오는 길에 만화책방엘 들러 보았다. 손 끝에 느껴지는 문고리의 느낌과 들어서며 맡아

지는 책 냄새가 낯설게 느껴졌다. 두달인가. 아니 석달만인가. 뭘 그리 바쁘다고, 뭘 그리 치인다고

그래 만화 책방 잠깐 들를 엄두도 못 내었을까. 그간 나온 신간들을 주워 담으며 나는 생각했다.


시험기간이기도 하고 뭣보다 전화요금을 내고 남은 돈이 가진 전부였기에 보고 싶은 걸 다 집지는

못 하고 적당히 골라 내밀었는데, 아마도 부귀했던 지난 날의 최대호가 오늘을 내다 보고 베푼 듯

한 만원이 선입금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해 놓은 일인데도 나는 한편으로 감동하고 한편으로는 감

동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작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학교로부터 신촌역, 인천터미널에서 집까지의 이 일직선 최단거리가 지난 몇달간 내

공간과 인식의 전부였던 것이다. 만화 한 권 빌릴 여유 없는 놈이 영화는 봤을까. 영화 볼 여유 없는

놈이 멀리 마실이라도 한 번 나갔을까. 마실 나갈 여유 없는 놈이, 한 번 멈춰서 숨이라도 골랐을까.

말하자면 결국 혼자서 괴로워할 만한 벽을 제 주위에 첩첩이 쌓아 가면서 응석을 부린 셈이 되는 것

이다. 남들이 그렇게 하고 세상이 그렇게 옥죄어도 어떻게든 그 벽을 깨부수고 아끼어 주어야 할

내 인생인데.



비가 들이치는 꽃나무들을 쳐다 보며 그런 생각들을 하던 나는 문득 '열심히 살아 주십시오'라는 말

을 했다. 너무 여유가 없었던 자신을 격려하는 데 예의를 차려서 말한 것인지, 혹은 나와 같은 생각

을 했던 이름모를 형제누이들을 향한 것인지는 말한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들어 다시 한번 되뇌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나 부자 되세요나 무슨 고시 준비해요

나 연봉 얼마예요 말고.



열심히 살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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