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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연세대학교 국문과 야구단

재학 중인 국문과의 고전문학 분과에 야구단이 창설되었다. 수가 많지 않은 남자 연구자들끼리 운동

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자는 것이 기본적인 취지인데 주된 발기인 두 분이 열렬한 야구 팬이었던 탓

에 운동은 야구로 한정되었다.


축구야 군대 가면 어차피 질릴 때까지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무 살의 최대호에게 네가 언

젠가 야구단에 속하게 될거야, 라고 말해주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속칭 짬뽕이라고 부르는

주먹야구나 중고교 시절에 그야말로 친목 도모를 위해 좀 했을까, 내내 서 있거나 앉아 있다가 잠깐

치고 잠깐 달리는 것의 어떤 부분이 즐거운 것인지, 나는 이 종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81년 생인 내 청소년기의 스포츠는 슬램 덩크와 연고전으로 대표되

는, 농구였던 것이다. 글러브를 끼고 다니는 아이들은, 촌에서조차 촌스러운 놈으로 취급받았다.


아니 그래도, 구도球都 인천 출신 아니십니까,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 인

천 사람들이 자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거나, 타 지역 사람들이 조롱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봐

도 무방하다. 요새 꼬마들이야 돈 많이 들어간 SK 와이번스의 승승장구를 보며 빳다 좀 휘두르고 다

닌다 하더라도 삼미 세대인 형들이나 태평양 세대인 나에게 있어 야구는 감추고 싶은 향토 역사이며

거대한 인천 컴플렉스의 주요한 동인이었다. 더 많은 눈물의 정보를 원하는 분은 소설을 가장한 20세

기 후반 인천 향토사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자.


이렇듯 아무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출발이었는데, 세상에 흔하고 흔한 야구 만화, 야구 영화처럼,

혼자서 백화점의 운동 코너에 가 괜히 글러브를 만지작거려보고, 거울 앞에서 공 던지는 시늉을 해

보고, 장난 삼아 주위 사람들에게 야구단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허풍을 쳐 보고 -직계 존속들은 끝까

지 믿지 않았지만- , 그러다가,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유니폼의 치수를 재고, '내' 글러브를 처음 갖게

되고, 돈 주고 야구공을 사고, 그 공을 손에 끼워서 돌려 보고, 허리를 써라, 손을 더 멀리 돌려라,

시키는 대로 해 보고, 그러다 보니 50개쯤 던지면 두세개 쯤은 아, 뭔가 야구의 원리가 내 몸에서 발

현됐구나 싶은 공들도 있고, 어려운 공을 잡아내고는 웃으며 칭찬하고 있는 캐치볼 상대에게 힘껏

공을 되돌려 주는, 그런 일들이,

아주, 즐거웠다. 그 중 어느 것 하나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서 클리셰로 쓰이지 않았던 것은 없을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본 이미지이다. 그래서 실제로 체험하더라도 식상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영 아니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회사 다니는 사람들한테 미안할 정도로, 거의 장기하만큼,

아주아주 즐거웠다. 몸이 쑤셔서 샤워를 하며 발바닥을 닦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런 것까지도 아주

재미있었다.


다다음주 쯤에는 유니폼이 나온다. 글러브에 손을 끼워 넣고 야구모자 아래 눈을 형형히 빛내고 있는

사진이 올라오더라도, 놀라거나 조롱하지 마시라. 마음은 이미 갑자원 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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