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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알포인트






영화 <알포인트>를 보았다. 강변 CGV에서 보고 나온 덕에 테크노마트에서 이것저것 구경할 기회

가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온 아쉽고 딱한 마음에 도무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다.


기대감이 좀 있었다. 올해 나온 엉망의 공포물들 중 끝물에 괜찮은 물건이 하나 있다는 평을 들은

터였다. (시실리도 공포물로 분류는 되었지만 보신 분들은 아시리라, 그게 어디 공포물인가. 괜찮

은 코미디물이지. 인간의 심리를 다루었으니 심리극이며 그 어두운 면에 집중했으니 공포물이라지

만 그정도 심리도 없다면 추석특집극 신세도 못 면할 것을.) 그 시나리오도 백번이 넘는 퇴고 끝에 나

온 것이라 했고, 주연하는 배우 감우성의 일보도 극장에서 돈주고 내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전혜

진과 함께 나오던 일요아침드라마부터 팬이었던 탓이다.


오랜만에 본, 연기에서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었다. 텍스트적인 연기에 익숙해져 있는 한두

연기자의 지나치게 완숙하며 노련한 감정표현(으, 끔찍해!) 탓에 이따금 거슬리는 데가 있었지만,

신뢰감을 주는 몇몇 배우들의 진중한 누름 덕분에 전체적으로 큰 무리없이 안정된 신을 이끌어내었

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연출이었다. 영화관람 전 읽었던 몇개의 인터뷰 채록에서, 감우성은 귀신이 직접 나온 장면

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기실 그 채록에서 내가 더 집중해서 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배우는 감독의 뜻과 타협해야

만 한다'라는 부분이었다. 똑똑한 배우이며 연출로서 매우 탐나는 배우다, 라는 생각이 먼저였지 귀

신이 뭘 어쨌을까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공포물인데 귀신 나오는게 당연하지 뭐. 포스터에도 귀신

하고 싸웠다고 써 놓고서는.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나는 그의 말에 절절히 공감하며 한편으로 감독

의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알포인트는 귀신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영화이다. 정확하게는 인간의 공포에 관한 영화

이다. 공포물이 귀신물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귀신은 인간의 공포를 형상화한 하나의 사례에 지

나지 않는다. 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알 수 없는 것(Unknown)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그리하여 자연계의 모든 것을 비롯하여 스스로 만들

어낸 것까지도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여 그것을 '알았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공포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힘이자 약점, 곧 상상력이다. 공포라는 감정에

몹시 정통한 감독 박찬욱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인간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 '인간은 말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비겁해지는 거래'라는 대사로 비교적 직설적인 견해를 보였지만 그것은 그만의

고유한 생각이 아니다. 어둠을 처음 접한 인간이 최초로 거기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자신이 접했

던 무서운 것들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보았을 바로 그 순간부터 이 패러다임은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수한 극작가들과 심리학자들에 의해 조금씩 더 세련되게 포장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알포인트가 단순한 베트남 기록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에 근접한 걸작으로 남기 위해서

는, 공포의 형태를 하얀 옷 입은 (심지어 무섭게 생기지도 않은) 여성의 형태로 구체화시킬 것이 아니

라 끝까지 그 정체를 밝히지 말고 모호하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공포에 가장 근접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통옷을 입은 소녀가 등장하는 바로 그 시점

에서 영화는 단순히 외국군에게 침공당한 베트남인들의 한을 그리는 전설의 고향 극장판에 머물고

말았다.


그나마 영화 자체는 그 전까지 어느정도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데에 있어 임팩트를 주는 데에 성공

했으므로 아깝다는 평가나마 받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포스터를 '그놈은 멋있었다'의 그것

과 함께 올해 한국 영화 포스터 중 최악의 물건으로 꼽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 포스터에

는 자랑스럽게도 쓰여져 있다. 우리는 '귀신'과 싸웠다고. 이 한줄의 문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

주는가. 극중인물들이 모두 무서워하고 너희가 영화를 보며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귀신'이란 이름

의 존재, 너희가 인쇄물과 영상물에서 그토록 접해왔던 그 존재, '귀신'이다. 아마도 하얀 옷을 입고

아마도 피를 흘릴 것이다. 근래 영화의 추세답게 적당히 큰 소음과 갑작스러운 포커스과 함께 등장

할 것이다. 너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아라.

관객은 귀신이 언제 나올지, 나온다면 링의 귀신보다 징그러울지 장화홍련의 귀신보다 무서워줄지

팔짱을 끼고서 주말오락프로그램 보듯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감독이 명백하게 이 작품의 핵심대사라고 생각하고 힘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대사가 '관등성

명을 대라'인 영화가 그래서는 안 된다. 불분명한 좌표, 즉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그 좌표

를, '관등성명'을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한 순간에 '그것은 베트남 귀신'으

로 지정해 버리다니. 이건 코미디다. 그것도 아주 저급한 코미디다. 죽쒀서 개 준 꼴이다. (개인적으

로는 영화의 결말과 포스터 모두 멍청한 제작자의 횡포가 아니었을까 하고 95%쯤 확신하고 있다.

'이건 뭔지 모르겠는데ㅡ, 요새 애들은 귀신도 나오고 소리도 크고 해야 돈주고 영화본다구. 장화홍

련 못 봤어?')


아무튼, 시실리는 기대하지 않던 C+짜리가 분발해서 B0는 받은 꼴이라 대견스러웠지만, 알포인트는

최소한 A-는 받았을 놈이 스스로 C를 달라고 들이대니 도무지 안타깝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

다. 아, 아쉽다. 아무튼 괜찮은 영화임에는 틀림 없으니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극장 가서 제 돈 다 주고

보시라. 그래줄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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