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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3

서울에서

 

 

 

 

 

 

나이 서른셋에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게 되었다. 삼 년 전, 제약회사 회장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회장의 딸

 

재혼이었다. 노리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결혼이었다 생각했다. 장인이자 회장은 전무가

 

되기 전 일주일의 휴가를 주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고향엘 갔다.

 

 

 

고향도 서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울이 아닌 주제에 서울이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은 오히려 서울만 못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후배는 순박하기 짝이 없어 한심했고, 일찍 세무서장이 된 친구는 적어도 고향에서는

 

갑 중의 갑인 자신의 처지가 서울에서의 성공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갖은 거드름을 다 피웠다.

 

 

 

여자를 만났다. 순박한 후배로부터는 러브레터를 받았고, 세무서장인 친구와는 자는 사이인 여자였다. 그러고

 

니 세무서장인 친구는 여자가 후배로부터 러브레터를 받은 사실까지 자기에게 말해주는 사이라며 수컷으로서

 

알량한 자존심까지 몽땅 털어 자랑을 했던 것도 같다. 여자는 따라와 서울로 데려가달라 말했다.

 

 

 

여자와 섹스를 했다. 같이 누워있다 보니 사랑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도 같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내에게서 전

 

보가 왔다. 회의가 당겨졌으니 급히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올라가기 전,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한다고.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준비가 되면 서울로 부를테니 올라오라고.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는 다 쓴 편지를 두 차례 읽어본 뒤 찢어버리고 서울 행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길가의 하얀

 

팻말에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져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

 

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처럼 쓴 이 내용은 이번 주에 강의하고 있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줄거리이다. 그때의 서

 

른셋이 오늘날의 서른셋과 같은 나이일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주인공과 동갑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가슴에 선

 

득하게 와 닿는 내용이 더 많다. 와중, 오늘 읽은 다른 책에서, 주인공 '나'가 다시 서울에 올라가 전무가 되어 살

 

아 가다가, 어느날 껍데기 같은 자신을 붙잡고 강남 어딘가의 룸살롱에서 혼자 울면서 부르고 있을 것만 같은 노

 

삿말을 보았다. 가수 김용만이 부른 <회전의자>다.

 

 

 

 

 

 

 

 

 

 

 

 

 

 

 

검색을 해 보니, 김용만의 <회전의자>가 발표된 것도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같은 1964년의 일이었다. 물경

 

50년을 앞선 선견지명에 웃어야 하나, 50년이 지나도 동병상련인 신세에 울어야 하나. 아, 먹먹해서 일기썼다,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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