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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산업시찰기 (2006. 07. 04. ∼ 07. 06.)



몸담고 있는 병역체제인 의무경찰에는, 해마다 각 서에서 일정 수의 모범대원을 뽑아 명승지와

산업현장을 돌아보게 하는 '산업시찰'이라는 제도가 있다. 아마도 전역 후의 장래에 대해 정보를 얻

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취지로 운영되던 것이라 여겨지는데,

인터넷 가입인구 2천만이 넘어간 오늘날에도 아무튼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모토는 2박 3일의 즐거운 여행이라지만 사실 개인행동해도 영창, 휴대폰을 숨겨갔다가 걸려도 영창,

영창 영창 영창, 흡사 어두운 시대의 함정수사를 연상케 하는 후속조치에 많은 대원들이 선발되

었을 때에 그리 즐거워 하지만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모범대원이라고 뽑아 놓고 2박 3일 동안 감시

하다가 뭣 좀 잘못 했다고 엇차 이놈 걸렸구나 하고 영창 보내는 것도 웃기지만, 모범대원이라고 뽑

혀 놓고서도 휴대폰을 걸리거나 하는 녀석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인터랙티브하게

비상식적인 행사인 것이다. 다만 군생활 내내 길어봐야 2박 3일정도인 특별외박이, 산업시찰을 다녀

오면 3박 4일짜리로 떨어지는 것에 희망을 걸고 오늘도 5만 전의경이 산업시찰 희망서에 눈물로 이름

을 쓰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튼 그 산업시찰에, 모범대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나는 기실 조용한 군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지 모범적인 대원은 아니다. 규정에 어긋나는 전기기구

만 해도 네 개를 사용하고 있는 데다 사무실 전화로 일본의 애인과 연애하는, 어찌 보면 국고를 축

내는 대원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인이야 남은 생애동안 지겹게 낼 세금 미리 좀 벌충해

놓자는 생각으로 죄책감 없이 지내고 있지만 아무튼 식충은 식충이라 할 수 있겠다. 글쎄, 군인식으

로 말하자면 조용해 보이면 결국 조용한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 모범대원이라면 머리를 조아리며

겸손히 받아들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속해 있는 내무반의 총원은 6명, 그 중 3명이 제대가 한달 이내인 전역예정

자이고, 한명은 매일같이 대장님을 실어 날라야 하는 운전대원, 다른 한 명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을 혼자 불 밝혀 놓고 밤새 지켜야 하느라 떨어진 외박도 못 나가고 있는 야간전문근무대원.

남은 선택지는 둘도 셋도 아니고 나 하나 뿐이었던 차라 2박 3일 고생 좀 하고 특박 좀 받지 뭐 하

며 체념하고 있던 것인데.


선발은 되고 특박은 취소됐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해마다 모범 전의경 선발 및 산업시찰에 관한

공문에 포함되어 떨어지던 특별외박 내용이 올 해에는 삭제된 채로 내려온 것이다. 나는 처음에 네

가 모범대원으로 결정됐다는 통고를 받았을 때에 후임들에게 양보하고 싶다며 한차례 짐짓 겸양을

차렸던 것을 상기시키며 내가 삼일동안 자리를 비우면 공항경찰대 교통계의 업무는 헤어나올 수 없

는 미궁에 빠지게 되는 것을 역설했으나 퇴근시간이 다 된 경비계 직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입이 불퉁 나오건 말건 시간은 잘도 가서 어느덧 출발 전날. 아침 여섯시 반까지 지방청으로 집합해

야 하기에 내무반이 영종도인 나는 부대에서 다섯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육지로 나가는 길에

도 자겠지만 그래도 일어날 때에 덜 피곤하라고 일찍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결국 열두

시쯤에나 눈을 붙였다.


  네시 사십오분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나갈 준비를 다 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기에 다 챙겨서

나가는 데에는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서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막내들이 졸

린 눈으로 뛰어 다니며 빨래를 걷고 있었다. 에이, 어차피 비 올 거 예보가 다 얘기해 줬는데 빨래는

미리 좀 들여 놓고 자지 왜 애들을 고생시키고 그럴까, 하고 막내 생활을 1년쯤 한 나는 혀를 찼다.


수차례나 언급하지만, 인천지방경찰청은 살고 있는 집에서 고작해야 오분 거리에 있다. 지방청으로

배치받길 얼마나 바랬던가. 이제는 두달 반쯤 남아 어떤 것에도 슬퍼지거나 즐거워지지 않는 나의

군생활을 한숨에 함께 뱉어내며 지방청 대강당으로 집합했다. 잘 다녀오라는 지방청 작전계장님의

간단한 훈시. 1년에 두세번 뵙기도 어려운 분이지만 항상 간결하면서도 신랄하게 핵심을 꿰뚫는 훈

시 내용이 멋지다고 생각해 왔다. 창가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출발이 나쁘지 않다.


간단한 자기소개만 하고 모두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상경, 수경들만 모아 놓았는데

도 어느덧 나는 대부분의 다른 이들에게 얼마 남지 않아 좋겠다고 부러움을 사는 축이 되었다. 지

나가고 보니 별 거 아니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첫 공식일정은 본 차이나로 유명한 행남자기였다. 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시청각물로도

배우고 현장을 돌아 보기도 했다. 어느 구석에는 그릇들이 행선지가 적힌 쪽지와 함께 잔뜩 쌓여 있

었는데 개중 '청와대 김구이용'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김을 몇장이나 구워 먹길래 접시를 몇백장

씩 시키나, 하고 한참을 쳐다 봤다. 막상 다 구워 놓은 것들을 보고 있자니 안내원 아가씨는 팔 기색

도 없는데 내가 먼저 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가씨의 설명 중에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흔히 쓰는 말인 본 차이나의 본은, bone으로, 뼛가루를

첨가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난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born china

인 줄 알았는데. 왜 born china인데 영국이 원산지라고 하는지 오랜 의문의 답을 얻었다.


강원도 가는 길은 항상 즐겁다. 서해안과는 산세가 다르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넋을 잃고 바라

보다 이따금 침이 흐를 듯 하여 꿀꺽 삼키면 귀가 뻥하고 뚫리는 것이 재미있다. 버스가 횡성휴게소

에 닿아 잠시 쉬는데, 딱히 볼일은 없었지만 그저 익숙하게 내렸다. 널찍한 화장실도, 맛없는 통감자

구이도 그대로.


창 밖으로 평창군의 이름이 보인다. 애인과 함께 갔던 몇 해 전 환선굴 여행의 이주일식당도 생각나

고, 2003년 연극과 인생 횡성 MT의 산끝분교도 생각난다.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있자니 샌달을 신

고 올라 갔다가 반 죽은 채로 내려와 울며 비빔밥을 먹던 2002년의 설악산행도 기억난다. 강원도,

반갑다를 외며 배를 채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강원도 음식이 맛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강릉휴게소에 내리니 안개가 흐른다. 마음의 고향 강릉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을 쉬어 가고자 내렸

는데, 영종에서나 보던 광경인 흐르는 안개가 펼쳐진다. 휴게소 바깥쪽이 사막인지 뽕밭인지 절벽인

지 알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근무지인 영종도에서는 종종 보는 풍경이지만 익숙한 강

원 가는 길에는 처음 접하는 터라 신기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둘러 보았다. 설악에 가는 길에 날이

궂다고 툴툴거렸는데 이렇게까지 궂으면 절경이다.


정동진. 들어가는 입구에 홍길동이 동방신기 포즈로 손바닥을 펼치면서 산불조심을 외치고 있다.

난 길눈이 괜찮은 편이다. 정동진은 사년전에 한 번 들르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세세한 풍경까지 모

두 기억이 나 자연스레 웃었다. 어병장님의 제대를 얼마 앞두고 들렀던 정동진. 사실 재미없어서

머리를 싸쥐며 심심해 했던 적도 있었으면서 왜 이십대 초반의 그 날들을 아름답게 추억하느냐 겁없

는 청춘들이 물어오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마치 내 앞에 무한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하릴없이

생을 낭비하던 그 무모함이 부럽기 때문이라 말하겠다. 그 때 내 나이는 스물둘이었고 라디오에서는

신인가수 비의 나쁜 남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동진에 내려 바다를 본다. 동해는 힘차고 아름답다. 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잔뜩 껴 다소간 처

연하지만 만약 똑같은 조건에서 서해의 석양을 본다면 나같은 인천의 아들이 아니어도 누구나 아려

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 것이다. 동해는 이런 날에조차 활기차고 아름답다. 보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그 무심한 역동성이 좀 얄밉지만 에메랄드 빛의 물이 거품을 연방 뱉는 꼴에는 멍해지고 만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딱히 멋을 부리려거나 작심하고 시를 쓰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파도야 너

는 무엇을 위해 계속 치대느냐 묻고 싶어진다. 오로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무심으로 쳐다보는 사람

을 궁금하게 만들만큼, 동해는 계속해서 파도를 힘차게 뱉고 또 뱉는다.


뭐 색다른 건 없나 해서 잠시 기념품 가게를 돌아본다. 4년 전에는 영소한 몇 개의 포장마차에서, 비

닐을 걷고 들어가야 무엇을 파는지 겨우 볼 수 있었고 어병장님의 건성건성한 흥정에도 턱턱 값을

깎아 줄 정도였는데 이제는 메이드 인 차이나가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고 포장된 박스가 쌓여 있는 등

규모가 가히 기업적이 되었다. 말도 안 꺼냈는데 2000원짜리 세 개를 사면 5000에 해 준다는 말로

보아 흥정한다고 작심하고 덤벼 들었더라면 만원에 일곱 개쯤 샀을지도 모를 배 모형을 서너개 샀

다. 싸긴 하지만 그 값어치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등뒤로 들리는 파도소리에 취하고 눈앞에 전

시된 범선들에 취해 나는 천원을 더 깎아 준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손사래를 치고 오백원 동전 하나

만 받아 들었다. 정동진역 입장료가 오백원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오백원에 그럴 듯한 입장권도 준다. 들어오길 잘 했다.

  
벤치에 앉아 동해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본다. 웃음이 난다. 4년 전에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와서도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재미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었는데, 이제의 나는 얼굴 한 번 안 본

사람들과 비오는 날에 와서도 종이와 펜을 들고 신이 났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괜찮은 사진구도

들이 눈에 띄지만 사람이 없는 풍경사진은 어쩐지 찍기 싫어 카메라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대충 스

케치를 하면서 혼자서도 재미있게 노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더

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쉬웠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나는 큰 돈과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재미

있게 놀 수 있을텐데.


동해의 바람에서는 짠내가 덜 난다. 그러고 보면 공기 중의 염도나 습도로 바다가 얼마나 떨어져 있

는지, 언제쯤 비가 얼만큼 올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내 능력도 서해에서만 먹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곧, 코를 벌름거리며 땅에서 올라오는 비냄새를 맡고 있는데도 유치한 개그인줄로만 아는 둔한 육지

것들과 설마 같을까, 하고 털어버렸다.


소나무들을 보자 생각이 났다. 나는 지리 과목을 무척 좋아했다. 게다가 첫 수능을 보던 해가 지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때이기도 했다. 비록 전년도인 99년부터 쉬워지는 추세가 가속

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명사길 좌로 두고인지 우로 두고인지의 시조가 어디에서 지은 것인지 해

당하는 곳을 강원도 지도에서 고르시오라는 문제가 나온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던 것이다.

비록 불길한 예감은 엉뚱하게 언어영역에서 대적중했지만.

꽤나 자세한 부분까지 공부했어도 세월이 흘러 태반은 까먹었지만 강릉에는 올 때마다 해송(海松)

은 방사림 겸 방풍림이라던 부분이 기억난다. 강릉고등학교 전교회장을 역임하신 류왕수씨는 수업

중에 경포의 모래가 창으로 들어올 정도로 해풍이 세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들으며 뻥치시네라

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 강우예상능력도 동해안 사람들이 보면 뻥으로 들릴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간의 차이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모래가 불어오니 방사림을 심는다라, 이 얼마나 멋진 말이

고 정책인가. 진정한 풍류란 공과 사를 아우르는 것이다.


경포를 옆으로 하고 지나가는데 문득 조이랜드가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때엔 돈이 없어 저렴한

요금임에도 놀이기구를 몇 개 못 타고 사진만 찍다 왔는데. 너도 아직 살아 있었구나. 반갑다.


오죽헌에 들렀다. 안내문을 보자니 1975년에 오죽헌烏竹軒 정화사업淨化事業에 의해 정비되었다고

한다. 정화淨化라니, 참 박정희같은 말이네, 하고 나는 기분이 찝찔해졌다. 왜 똑같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저따위로 했을까. 군인의 마인드는 이해할 수가 없거나 이해하더라도 불쾌하다.

오죽헌은 강릉의 유생 최치운 선생이 짓고 아들 응화가 이어받아 사위 이사온에게 넘겨 주었으며

이사온은 사임당의 부친인 사위 신명화에게 넘겨 주었다 한다. 신명화는 후에 또 사위 권화에게 물

려 주었으며 그 이후로는 권씨 집안에서 관리를 해 왔다는 것이다. 그 여러명이 모두 딸만 낳았던

것일까, 아니면 사위를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

을 것만 같았다. 이래서 여행은 선생님과 가야 하는데. 집에서 책으로 읽으면 응 그렇구나 하고 말

것을 거기에서 오죽헌이 왜 사위들에게만 이어졌는지 선생님에게 들으며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바닥에 앉아 깡소주라도 좋다고 들이켰을 것이다.



2일째, 차는 드디어 설악으로 향한다. 이슬비인데도 옷이 금세 젖는다. 우의를 사는데 일반인은

2000원, 군경은 1500원. 입대하고 받는 첫 할인이 설악이라니, 멋지다. 설악산 입구의 유명한

대불大佛, 몇 번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유심히 보니 신흥사新興寺 대불이란다. 태백산

에도 신흥사가 있었는데, 보편적인 이름인가. 그러고 보니 새로 흥하는 절에 붙이기에는 자못 괜찮

은 이름이다. 하긴 전국에 신작로가 몇천개일까.


대불 앞에 두꺼비가 입을 벌리고 돈을 달란다. 왜 두꺼비일까. 잘 어울리는 이미지이긴 한데 왜 두꺼

비일까. 등딱지가 동전처럼 생겨서 그런가. 거북이나 용도 아니고 -하긴 용이 돈달라고 보채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두꺼비라니.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갸웃거렸다.


돌아서면 용봉대향로가 있다. 그렇지만 용봉대향로는 백제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

나라에서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많다는 것이다. 아무려면 어때, 예쁘면 됐지.


뒷짐지고 오르는 설악. 비선대까지는 그렇게 여유 부리며 가도 그럭저럭 괜찮다. 하늘을 함께 질

수 없는 원수 설악산의 계단들도 여전하고 사람 놀리는 듯 빤히 쳐다보며 도토리 갉아먹는 돼지다람

쥐들도 여전하다. 발밑에 돌쩌귀 사이로 흐르는 물도 그저 맑은 물일뿐일텐데 설악이라고 생각하니

예사롭지 않다. 마침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적셔

나온다. 아, 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내게는 특별한 순간이라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이 되

었을까. 미안, 루이. 그래도 What a wonderful world구면.


흔들바위까지면 산책로와 별다를 바가 없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설악에선 언제나 쾌변,

백전백승이다!) 혼자 걷고 싶어 맨 뒤에 간 것도 모르고 흔들바위에 먼저 도착해 있던 대원들은 늦게

왔다고 타박을 한다. 비가 와 바위가 미끄러워 더 올라가진 못 하고 내려오는데, 어느덧 설악의 산신

령이 된 듯한 기분의 나는 화장을 짙게 하고 올라오는 처자가 보일 때마다 다 들리게 혀를 찼다. 발

밑의 돌을 주워 얼굴을 박박 씻겨 주고 싶구먼. 설악에서까지 휴대폰을 들고 짜증섞인 목소리를 내

는 사람도 있었다.


도중에 만난 다리의 이름이 극락교極樂橋다. 길가의 조그만 동자불도 대불大佛, 두어평 되어 보이

는 암자가 삼성전三聖殿. 불교의 이런 유쾌한 허풍이 무척 마음에 든다.


입구에 다 이르러 더 입지 못 할 우의는 우산 없이 오르는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메밀꽃 필 무렵

의 봉평샘물이라는 생수도 제까짓게 아무리 해 봐야 설악의 냇물에 비할까 싶어 내내 섞지 못 하고

있다가 입구에 와서야 휘휘 버렸다. 입구의 반달곰새끼가 씩 웃으며 안녕안녕한다. 그래 안녕. 잘 있

어라.

  
버스를 기다리며 속는 줄 알면서도 관광기념 삼아 설악산지도가 그려진 노란 손수건을 산다. 머리

를 감쌀 정도로 길지는 않아 등산 내내 걸치고 있던 양머리 수건을 다시 쓰고 손수건을 휘 펼쳐

보니, 이름도 나한봉, 범봉, 선녀곡, 참, 멋지기도 하다. 돌이 많다고 록키 산맥이라고 부르는 센스

에 비하면 천지차이다. 그것 참, 그것 참, 하고 보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두리번두리번거리는데

나무의 푯말이 눈에 띄어 읽어 보았다.


  쪽동백. 때죽나무과. 낙엽지는 넓은 잎의 큰키나무. 5·6월의 끝이 네갈래인 하얀 통꽃은 20송이

정도 조롱조롱 달려 피고 둥근열매는 9월 경 가지에 나란히 달린다.


모두 한글로만 쓰려 애쓴 흔적이 역력해 보는 동안 흐뭇해졌다. 두어번 읽자니 시같기도 하고.


그래도 등산이랍시고 피곤해져 버스에서 자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니 낙산사다. 이름만 무수히도

들었던 낙산사. 중턱쯤에 오르니 앞으로 탁 트인 지평선이 보인다. 감탄을 하면서도 죽기 전에 사방

으로 완벽한 지평선을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더 한다.

길은 멀지 않은데 경사가 심해 겨우겨우 올랐는데, 낙산사 낙산사, 과연 허명이 아니다. 거대한

해수관음상 앞에 서 있자니 좀 전의 반쪽짜리 풍광과는 달리 뒤로는 강원의 산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바다가 펴졌다. 매일같이 접하면 신심信心이 생기지 안고는 못 배길 것이다.

경내에는 온통 작년에 있었던 대화재에 대한 불자들의 통곡성이 가득했는데, 나무도 있고 돌도 있으

니 다시 짓기만 하면 되지 뭘, 하고 느긋하게 생각할 정도로, 터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큰 자연을 접하고 난 뒤라 더 그런 것인지, 더벅머리의 청년들이 그닥 예쁘달 것도 없는 처자들에게

추근거리는 낙산해수욕장에서는 입맛이 쓰다. 네시무렵 숙소에 짐을 풀었는데 여섯시에 저녁을 먹

을 때까지 자유시간이라고 해서 모래사장에 티셔츠를 깔아 놓고 한시간쯤 잤다. 해는 높았고 주위

는 시끄러웠는데도 잠은 잘 왔다.


잠에서 깨어 뒤척거리며 생각한다. 여섯시에 밥먹고 낙산사로 바로 올라가면 일몰을 볼 수 있을까.

심한 오르막길이 귀찮기도 했고 그 시간이면 이미 해가 져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누워있는 것

보다는 낫겠지 싶어 식사가 끝나는 대로 올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녁먹고 여덟시까지는 자유

시간이라고 했으니 여운을 즐길 시간도 충분하겠지. 저녁시간까지 삼십여분이 남아 여기저기 기웃

거리는데 해변 바깥쪽에서는 바이킹 정비가 한창이었다. 흔들흔들거리는 바이킹 위에서 아저씨들

이 열심히 뭔가를 뚱땅거리고 있었는데, 난 거기에 서 있기만 하면 현금으로 시급을 준다 해도 싫

었다. 한참을 쳐다 보다 발걸음을 돌렸는데도 시간이 남아 편의점에 붙어 있는 전지현의 17茶 포스터

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일까 가짜일까, 전지현의 몸매는 마이젯 CF를 처음 보던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미스테리이다.


여섯시 정각에 시작한다던 저녁식사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새 가슴 높이까지 바다에 들어

갔다가 통솔하는 직원에게 걸린 녀석들 때문에 훈시를 듣느라 이십분이나 늦춰졌다. 여섯시에는 거

의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고 애태우던 나는 식사가 시작되자마자 밥 두공기

를 여남은술에 먹는둥 마는둥 우겨 넣고 양손에 수박 한 쪽 씩을 들고선 낙산사 쪽으로 내달렸다.


숙소에서 낙산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오르는 시간은 분명히 지나가고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어서

조금 달렸다. 달리는 오른쪽 바다의 멀리에, 부지런한 오징어잡이 배 한척이 통, 하고 불을 켰다.


낮에는 삼십여분이 걸려 올라간 길을 십분만에 헐떡거리며 올라가자 궂은 날이지만 다행히 해는 지

지 않았다. 미리 봐 놓았던 해수관음상 앞의 명당으로 갔는데 참새 일고여덟마리가 모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참새 일당은 꼼짝하지 않아, 다가가며 휘 내치고 그 속도 그대로 털썩 앉으려던 내

가 되려 주춤했다. 개중 대장인 듯한 녀석이 나를 힐끔 보더니 엣다 이 비루한 녀석아 낙산에 처음

왔으니 내 한 번 양보해 주마라는 듯이 후두둑 날아가자 나머지도 내 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따

라 날아가 버렸다. 나는 눈을 꿈뻑거리며 엉금엉금 돌 위에 앉아 양말을 벗었다.


이제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바위 위에 반쯤 누워 이어폰을 끼우고 대양大洋의

함가艦歌를 듣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있다 문득 왼쪽을 보니 그나마 있던 약간의 해가 산 뒤로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눈 앞의 바다쪽으로 넘어갈 줄 알고 있던 나는 에잇 하고 혀를 찼지만 고쳐 앉기가 귀찮아 목만

돌렸다.


작곡가가 긴 항해를 마치고 멀리에 고향이 보이는 선원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CLOSE

TO HOME'이라는 연주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가장 큰 볼륨으로 올렸는데도 파도 소리

는 들렸고, 오십 걸음쯤 바깥쪽에서 할머니들이 불상 앞에 피워 놓은 향의 기가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점차 가장 먼 하늘이 어두워지고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가 옅어진다. 여덟시까지 숙소로 집합이라

시간은 약간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일몰은 틀렸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놓칠 광경은 밤바다와 어느

덧 오십여척으로 늘어난 오징어잡이 배들뿐이라 아쉽지만 뼈아프지는 않았다. 내려가기 전에 해수

관음상 앞에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세 번 절을 했다. 가족과 가족같은 이들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까지는 무의식중에 나왔는데, 세 번째의 절이 다

내려갔는데도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던 나는 뜬금없이 잘 살겠습니다, 라고 빌었다. 이왕이면 탑

돌이까지 해야지, 하고 한바퀴 두바퀴를 도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모여 엄숙해졌다가, 세 번째 바퀴

에서는 중간쯤에서 멈춰 서 씩 웃으며 허리손을 하고 저, 아시죠? 최대호예요, 잘 살게요, 하고는

씩씩하게 큰걸음으로 나섰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하나 한 기분이었다.


셋째날에는 김일성 별장이나 통일전망대 등, 전일의 구경거리에 비해서는 임팩트가 적은 곳들을 들

러 그리 큰 감흥을 받지 못 하고, 마지막 예정이었던 하이트 공장에서 시원하게 시음을 하는 것으로

일정은 끝났다. 맥주김에 또 자다가 일어나니 어느덧 집 근처. 집 근처에 버스터미널이 있어 시외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도 집으로 가는 길. 제대가 멀지 않아 그래도 집이 아니라 지방청으로 향하는

차가 덜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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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오고 있다는데  (3) 2006.07.09
집에 왔다.  (0) 2006.07.08
드디어 7월이구나.  (0) 200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