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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보미에게

보미.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라, 매해 내가 말하듯 인천에서 부는 밤바람에선 색향色香이 느껴지기 시작했

어. 편지의 맨 처음은 날씨로 시작하는게 좋다고 마지막으로 배운게 15년전쯤 될텐데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란 무섭다.


어제 신문에서 봤다. 지하철 수인선(水仁線)이 2008년이면 개통된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된다면

서울의 유명 상권들만큼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동인천만한 상권정도는 그 사이에 생겨나겠지. (그러

나 아무리 잘 봐줘도 주안만한 상권은 더 생겨나지 않을거야. 흥.) 역사를 통해 전례없었던,

수원-인천 주민간의 서로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있을 것이고. 사실 차 있는 사람들은 알잖아.

안산, 수원하고 인천하고는 정말 금방이라고.


너와 내가 2008년에 입학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인천-수원간에 무슨 축제라도 매년 벌어져

정말 서로 가깝게 여길 2020년쯤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집에 있다가 툭 전화해서 산책할

만큼의 여유는 서로 더 가질 수 있었겠지. 그런 생각하다보면 안타깝다가도, 우리가 뭐 05,06학번들

이라면 무릎을 치고 개탄해도 그럴만 하겠지만 XX,XX학번인데에야, 흐흐흐...

...애써 웃어보려 하지만 역시 아직 나이자학개그는 익숙해지질 않는다. 미안.


갑자기 하는 이야기이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나누는 것일까?


흔히들 생각하듯이, 대학일까?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생각하듯이, 성경험일까? 범생들이 생각하듯이,

소주와 담배일까? 혹은 아주 드물게 보는 경우지만, 결혼과 출산일까?


언젠가도 이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난 내가 '어른'은 모르더라도 뭔가 '전과는 다른 세계'

로 들어갔다고 가장 절절히 느꼈던 적이, 깎지 않은 사과를 하나 통째로 먹으며 손에 사과즙 한 방

울 흘리지 않았을 때였어. 난 그때의 바람과 기분, 그날 있었던 일들까지 모두 기억나.

그전까지는 항상 궁금했었거든. 어떻게 어른들은 사과를 통째로 먹으면서 손에 물 한방울 안 흘릴

까. 마지막에 씨를 중심으로 남겨지는 부분 있잖아. 거긴 어디까지 먹어야 좋은 걸까. 더이상 먹어

도 좋다 좋지않다의 결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냐하면 다른 음식들은 확연히 알 수가 있잖

아. 먹어도 되는지, 먹으면 안 되는지.


이렇게 해석하면 너무 나한테만 좋은 쪽이겠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처음으로 '책임'

이라는 개념에 본질적으로 접근했던 순간인 것 같아.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올바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여, 끝내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책임.


또 갑자기 하는 이야기. 나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를 꼽으라면, 인간의 내외면으로 하나씩

꼽겠어. 내면으로는, 이기심. 외면으로는, 상황.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이라는 것은, 인문학과가 아닌 다른 과의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렇게

충격적인 사실이 아니야, 그렇지? 동네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뭔가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좀 해다오, 해서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

을 보면, 난 그들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다라는 학문적 사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심리학과 4학년의 마지막 수업날. 교수님이 어쩐지 비장한 표정으로 교단에 선다.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교수님은 큰 결심을 한 듯 주먹을 움켜쥔다.

너무나 강력한 악력에 주먹 사이로는 피가 흐른다. 교수님은 강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커텐을

모두 치게 한 뒤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듯 말을 시작한다...

'자네들 모두 지금까지 잘 해 주었네...그 댓가로 우리 심리학파에 사천년간 전해 내려오는 비전

을 가르쳐주지...그것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것이닷! (일동, 헛하는 신음소리)

자아, 나는 비전을 말했다. (교수님의 손이 빛나기 시작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자는 여기서 내 손에

죽어라...'

이렇게 생각하는게 아닐까.


그렇지만 사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건 학부생 대상 교양수업인 '현대사회와 심리학' 첫 중

간고사에도 나오는 문제라고. 그것도 낮은 배점으로. 모르면 혼나는 거란 말야.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 그렇지. 심부름을 시킬 때에도 왜 쟤를 시키면 신나고 날 시키면 싫은가,

그건 '내' 몸이 힘들기 때문이지. 같은 이유로 3D업종도 기피당하는 거고. 어떤 사람은 성욕도 한 동

기로 봐줘야되는 게 아니냐, 물론 성욕도 분명 강력한 팩터이지. 그렇지만 성욕 자체로는 큰 문제

가 없어요. 문제는 '내' 씨를 뿌리고 싶다는 데에 있는거지. 연애를 하는 것도, 결국은 '내' 기분이

좋기 때문이고. 사람과도 마찬가지야. 기분이 좋든지, 공감을 하든지 여하튼 뭔가를 '내게 얻게'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 만나면 기분이 나빠지든지 공감을 할 수 없어 시간낭비했다고 생각하게 하든지

아무튼 뭔가를 '내게 잃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


그런데 이건 좀 어려워요. 이기심의 한계라는 게 사람마다 들쑥날쑥이라 말이야. 아프리카 구호활

동을 하면서 정말로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사람을 본다면 어떨까. 기분나빠지는 사람을 자꾸 만나며

자신의 폭을 넓히려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떨까. 등등등.


반면 '상황'은 강력하지. 정말 강력해. 그 앞에서는 각각의 개성을 지닌 인간들마저도 일사불란

한 행동과 의식을 보여주는 탓에, 앞으로의 일이 어찌될까를 예측하고 마음을 달래려는 시도가

대부분 헛되지 않아. 그래 나는 왜 이 상황에 이런 행동들을 보일까. 그런 행동들에서는 어떤 말들이

나올까. 이런 걸 생각해 보는 것으로 공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 물론 직접 경험하는 것만

큼 좋은 건 없지만, 남들에게 좋은 충고를 해 주기 위해 내가 모든 고생을 사서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근래에 내 주위에는 상황의 피해자들이 많았어.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경우이지. 차라

리 의지 자체가 도무지 통하지 않는 것이면 모를까, 상황이라는게 또 치사한 데가, 의지를 야금야

금 갉아먹어 스스로 번뇌하게 만들거든. 무슨 이야기인지 아마 알거야.


글이 너무 깔때기처럼 부풀기만 해서, 어느정도까지만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뭐였는지를 말하

면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


나는 사실 너의 마음에 공감하는 이야기들을 하면 안 되는 거였지. 네가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옆에

있어줄 수도 없는 거고. 어느정도 적당히 이야기하면 그저 방명록에 남기는 글과 거기에 대한 리플

정도로 스윽 지나갔을 것을 괜스리 진심의 진심에 닿아 있는 말을 한마디 덧붙여서 네가 한 번 더

가슴 서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고. 거기에는 너로부터 이해받고 너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내 이기심이 있었고, 나는 이제부터 나의 그 이기심에 부응할 만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너는 네가 내렸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

고, 그 책임이 괴로운 것은 그것이 개인의 의지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책임과 이기심, 상황에 대해 짧게 적어본 것인데,

영 정신사납게 됐다, 그치. 하나하나가 일기 하나 주제거리로도 차고 넘치는 것들인데 말이야.


다시 읽어 봐도 너무 에둘러 왔어. 그렇지만 여기에는 근래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

기도 들어가야 했고, 그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나 자신에의 자계도 들어가야 했고...


아무튼 그래서 다 얼버무려 그냥 받는 사람 이름 없이 보낼까도 생각해 봤는데, 다시 한 번 이기심

으로 못난 글이나마 누가 가장 이 글을 진심으로 읽고 공감해 줄까 생각해보니 역시 네가 생각이

나서 이 잡글을 네게 보낸다. 적어도 너는, 정신사나운 편지를 받아도 읽어줄 사람이라는 걸 내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신 사납구나. 어쨌든, 영화를 보고 밥을 먹자. 그게 결론이지 뭐. 건강하고.



                                                                                                      2004. 5. 6. 목.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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