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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로버트 셰클리, <불사판매 주식회사> (행복한책읽기. 2003, 4.)

 

 

 

 

 

어슴푸레 기억이 나는 무렵부터 나는 돈을 모아 책을 사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용돈으로 보물

 

섬과 학생과학을 사고 나면 새로 구입할 수 있는 책은 한 달에 고작해야 한 권이나 두 권 남짓이었기 때문에, 유

 

소년기의 내 독서는 대부분 엄마가 사 준 전집류에 빚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새로 들어오는 전집류의 수준은 조금씩 올라갔지만 그래도 아무튼 세계문학/한국문학/위

 

인전의 구성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홀로 이채를 발하고 있었던 것은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주니어

 

공상과학 명작선>이었다. 

 

 

멀리서 책장을 바라볼 때부터 이미 달랐다. 몇십 개의 새하얀 표지가 자라락 꽂혀 있는 다른 전집류와는 달리,

 

이 전집류만은 책마다 총천연색의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각기 다른 색채, 다른 화풍을 택하고 있었기 때

 

문에 이 전집류가 꽂혀있는 칸은 마치 열대의 우림과 같은 인상을 주곤 했다. 한 권을 뽑아내면, 공상과학 전집

 

류의 책인만큼 그 내용이 잘 반영된 표지 그림은 한 편의 영화 포스터와 같았다. 지금 피곤한 하루 끝에 자기 전

 

에 딱 한 편 볼 DVD를 고르듯, 그 시절의 나는 이런저런 표지 그림들을 보며 오늘은 달에 갈지 4만7천년 후의 미

 

래로 갈지를 결정하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소문난 출판사의 전집이라도 열에 하나쯤은 정말 재미없는 것이 섞

 

여 있고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것은 한 반쯤이나 될까말까였지만, 공상과학 전집만은 어떤 책을 꺼내들든

 

항상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난다.

 

 

이 전집들은 이십 대 초중반의 언제쯤 인천시립도서관에 기증됐다. 스무 살부터 독립을 한 내가 이따금 집에 들

 

러 한두번 뒤적거리는 것이 전부인 것을 생각해 보면, 대청소를 하던 엄마가 갑작스레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가가 언제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또 내가 맡아오기에는 좁은 하숙집을

 

전전하는 주제였던 탓에 나는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승낙이고 자시고 사실은 발언권이 없었다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른다. 헤어지던 날, 붉은 비닐끈으로 묶어 난짝 들고 가는 도서관 직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유소년기에 작

 

별을 고하는 아쉬움,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 기쁨을 주었으면 하는 뿌듯함 등이 어지럽게 섞였다.

 

 

잊고 있던 그 책들을 떠올린 것은 얼마 전 들른 헌책방에서였다. 한 귀퉁이를 돌아서는데 그 전집류의 냄새가 훅

 

하고 흘러들어왔다. 책마다 냄새가 다르다니, 우스운 소리라고 치부해도 좋다. 나도 굳이 증명하거나 강변할 생

 

각은 전혀 없다. 다만 종이의 질이 달라서일지, 묵은 시간이 달라서일지, 혹은 읽다가 내가 흘린 과자나 음식이

 

달라서일지, 아무튼간에 무언가의 이유가 있어서, 책마다 냄새가 다르다고 멋대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단지 이름만을 떠올렸다면 미소를 짓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냄새가 떠오르자 표지의 그림, 책의 그립감, 처음

 

만났을 때나 한 권씩 뽑아들었을 때의 흥분 등이 연이어 떠올랐다. 나는 집에 돌아와 시간을 내어 검색을 해 보

 

기로 했다.

 

 

인터넷에는 나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출판사가 금성출판사인 것도 이 때 알게 됐다. 표지

 

그림을 찍어올린 사람도 있었다. 와중 눈길을 잡아챈 것은, 정확한 원제와 지은이를 밝혀 다시 구성해 놓은 목

 

록표였다. 설마, 하며 학교도서관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몇 권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

 

책을 대출해 가방에 넣어 오면서도 그 내용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믿기지 않았다.

 

 

다시 만난 책은 기억과 많이 달랐다. 실제로 내용이 달랐다. 어릴 적 읽었던 '주니어 판'에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만이 빠르게 편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본에는 성이나 폭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적 갈등

 

등이 풍부하게 실려 있었다. 하기사 이런 걸 다 보여줘도 그 때의 나는 못 알아먹었겠지, 하는 우스운 체념 반,

 

주니어 판으로 편집해야 했던 그 형 참 고생 많았겠다, 하는 연민의 마음 반.

 

 

나는 오늘 시시콜콜하게 줄거리 소개나 비평 등을 적고 있을 생각이 없다. 기왕에 이 책을 몰랐던 분이라면 바

 

쁜 일상을 쪼개서라도 꼭 보시라고 굳이 권하고 싶지도 않다. 200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완역본도 절판이 되었

 

기 때문에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영상물이 많은 것도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던 때

 

출판사의 <주니어 공상과학 명작선>중 한 권을 붙잡고 흥분하며 외계와 미래를 탐험하던 과학소년이, 살다가

 

문득 어릴 때로 돌아가 잠시 쉬고싶어지는 때, 이리저리 검색하다 이 블로그로 흘러들어오게 된다면, 그 때 그

 

대로는 아니지만 그 책들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다시 만나면 다시 만난만큼의 재미와 흥분이 분명히

 

또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