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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다시, 방학

대학에 와서 네번째로 맞는 방학이다. (여섯번째들, 안 됐네 그려. 두번밖에 안 남았구면.) 대학에

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에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못 하다. 후배들이 물어오는 것에 무엇 하나 이

것이다! 라고 말해 줄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없어진다. 알아갈 수록

안다고 말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뭐, 그건 어려운 얘기에 관한 것이지만.


생활화제이지만 방학도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다. 시험기간에 항상 시험이 별로 없었던 탓에 학교에

는 가야 하는 의무감과 가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어정쩡함이 한데 버무려져 도무지 방학

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안산을 찾았다. 군에 있었을 때를 제하고는 몇년동안 방학 때마다 며칠간 같이 오락하고 이야기하는

친척형이 혼자 사는 곳이다. 이곳도 지난 여름에 이어 벌써 두번째다. 동네 어귀서부터 눈에 생생히

익어 있어 반년이 지났다는 것이 새삼 무색해진다.



형과 지낼 때의 나는 그야말로 의무감 제로 상태에 있다. 씻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다. 씻고 싶으면 씻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오락하고 싶으면 오락을 하고, 나가서 돌아다

니고 싶으면 씻지 않고 슬리퍼를 끌고 나가 돌아다닌다. 성인물을 보고 싶으면 성인물을 보고, 아동

만화를 보고 싶으면 아동만화를 본다. 무엇하나 거슬릴 것이 없다.




오락과 만화를 좋아하는 형은 못 보는 동안 보물같은 것들을 잔뜩 쌓아 놓는다. 새 게임 타이틀들과

이름난 애니메이션들 등등, 형의 방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에는 항상 뜻모를 짜증같은 것이 난다. 아,

이걸 어찌 다 보나. 이걸 어찌 다 하나. 그러나 막상 내가 즐기고 있는 것들은 (아마도 나때문에 버

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예전 오락들과 예전 만화들이다. 방학 때마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보며 나는 지난번 그 것들을 보고 있었을 때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내 생활

이 어땠는지를 추억한다. 그리고 그 위에 2002년의 겨울까지라는 새로운 추억을 올린다. 이따금 가슴

이 떨릴 정도의 추억이 살아나기도 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정리해서 접어 추억으로 올리며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집으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항상 그랬듯이 이곳에 그대로 놓

아 둘 것이다. 다음 방학 때 다시 와 그 때까지의 일을 다시 또 쌓아야 하니까. 그리고 그 때에 기다

렸던 만큼의 보람을 다시 느끼도록.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치 아웃라인만이 그어진 백지와 같은.

청년기의 입구에서 이것을 지키고 살자, 라고 순수한 열정으로 그어 놓았던 아웃라인만이 남겨진 백

지 위에서, 이전까지 의무감이나 혹, 가끔 우월함등에 지배당해 머릿속에 있었던 것들은 모두 지워

지고, 새로운 생각들로 정리된 다음 반년간의 일정이 세워진다.




다시, 방학이다. 그리고 최대호 2003 나가신다. Peace 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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