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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느낌, 관찰.





아, 기술의 발전이란 정말이지 놀랍지 아니한가? 이것이 어제의 그 사진과 같은 물건이라고는 도무

지 믿을 수 없는 지경이니.


몇차례 언급했던 것과 같이 뽑기는 내 오랜 취미중의 하나이다. (더불어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도박의 맥시멈이다.) 정식용어는 가샤퐁, 혹은 가챠퐁이라고 하는, 100원이나 200원 정도를 집어넣

고 드르륵 돌리면 그 가격에 걸맞는 크기의 캡슐이 나오는, 그 뽑기 말이다. 뭐, 그렇게 흘러간 예

전의 이야기처럼 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지간한 동네에는 다 있으니까.


새로 과외를 하게 된 아이네 집 근처에는 500원짜리 뽑기가 있다. 뭐가 들었길래 그리 비싼고, 하고

안쪽을 들여다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반투명 캡슐 안쪽에 있는 것은 분명히 레고의 작은 세트였다.

자동차나, 배와 함께 있는 사람 하나. 이것이라면 500원은 충분하다! 라고 생각하고 벌써 3000원 정

도 쓴 것 같다. 뽑기랑 노처녀는 겉에 씌여진대로 나오는 적이 한 번도 없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심

통이 나기도 하고 마침 주머니에 400원밖에 없기도 하고 하여 오늘은 과외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새로 들어온 '반지의 제왕' 세트를 뽑아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놈이 네번째의 100원을 꿀꺽 먹어 버렸다. 주인은 아닐 터이고 분명 주인의 딸일 것이라

고 추정되는 내 연배의 아가씨는 뽑기가 돈을 먹었다고 100원을 달라는 나를 보며 시종일관 웃어 대

었다. 원, 무례한 것 같으니. 결과로 말하자면, 나는 100원을 얻은 셈이 되었다. 뽑은 것이 나오지 않

고 걸려 있다가 그 다음에 얻어 온 돈으로 뽑은 것과 함께 툭 떨어져 있던 것이다. 아가씨가 보면 도

로 달라고 할 것 같아 얼른 주머니에 챙겨 넣고 황황히 자리를 떠났다.


지하철역으로 종종 걸음을 옮기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섰다. 똑같은 상황. 돈을 먹은 줄 알고 주인에게

100원을 받아다가 다시 돌려 본 기계에서 막혀있던 것까지 두개가 한번에 나오는, 그 상황. 그  똑

같은 상황이 십수년전에 있었던 것이 머리를 때리듯 기억난 것이다. 날씨는 더웠고 장소는 십이삼년

전에 살던 간석동의 자주 가던 슈퍼 앞, 뽑는 물건은 울트라맨이었다. 세상에.


이따금 그럴때가 있다. '기억'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생각나는 예전의 일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자주 사먹었던 과자나 사탕의 냄새, 맛이 생각나고 새로 산 장난감에서 나던 플라

스틱 냄새도 떠오른다. 싸구려 선글라스를 끼고 먼 곳을 보면 바닥이 울룩불룩해 보여 놀라던 그

느낌, 새로 산 플라스틱 칼에 태양검이라 이름 붙이고 옆집여자애를 찔렀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푸

욱 들어가 진짜 죽인 줄 알고 후다닥 도망가며 묘하게 손끝으로 전해오던 사람을 죽인 느낌.


여하튼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하철에 있다가 과연 뭘 뽑았는지 꺼내 보았다. 김리 하나, 원가가 십원

도 안 돼 보이는 호루라기 하나, 그리고 아라곤이 세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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