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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노영수, <기업가의 방문> (후마니타스. 2014, 3.)

 

 

 

 

제목이 문학 작품의 패러디이고, '어느 기업 대학에서 생긴 일'이라는 부제에서는 그나마 책의 내용을 조금쯤 추리해볼 수 있지만 글자의 크기가 워낙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책 소개부터 하기로 한다.

 

부제에서 가리키는 '어느 기업 대학'은 2008년에 두산에 인수된 중앙대학교를 말한다. 저자는 이 중앙대학교의 독어독문학과에 03학번으로 입학한 노영수 씨이다. '기업 대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라면 이 정도만으로 책의 상징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업이 대학을 인수한 뒤 일어나는 변화에 있어 중앙대는 삼성의 성균관대와 함께 그 폐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혔다. 인수한 재단이 대기업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해당 기업들이 대학을 인수한 후 시행한 조치가 '격'을 깨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영수는 학교 재단이 된 두산그룹과 중앙대 이사장이 된 두산중공업의 박용성 회장에 맞서 싸웠다. 2009년, 사회의 각종 현안에 진보적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하던 독어독문과 겸임교수 진중권 씨의 재임용이 석연치 않은 이로 취소되었을 때, 재단에 비판적인 의견을 실었던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 58호가 배포일 날 밤에 몽땅 사라져버리고 그 후 교지 예산이 전액 삭감되던 때, 노영수는 시위와 기자회견의 전위에 서 있었다.

 

같은 해, 학생 사회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인 농활을 해체하기 위해 두산은 고액의 장비를 무료로 지원하고 '스펙'에 쓸 수 있는 총장 확인의 봉사 확인증까지 내어 주는 국토 대장정 행사를 시작했다. 다음 해인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집행부가 2회 국토대장정에 참가 신청서를 내자 '회장님 오시는 자리에 운동권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은 결례'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노영수는 이 행사에 항의하기 위해 국토대장정단이 가는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며 삼보 일배 시위를 하였다.

 

2010년 박용성 이사장이 학부제를 재차 도입하며 경영대 신입생 수는 늘리고 '경쟁력 없는' 학과의 폐지를 선언했다. 노영수는 이에 항의하며 본관 앞에 가로 5미터, 세로 2미터 가량의 콘크리트 벽을 만들었다. 학교 측의 불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였다. 농성장은 결국 붕괴됐고 학교 측에서 징계위원회를 열어 강한 제재를 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노영수는 교내 신축 현장의 타워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크레인에서 일곱 시간 동안 시위를 한 노영수는 이로 인해 퇴학 조치에 처해졌고 별도로 업무방해로 고소당했으며 하루동안 공사가 쉬어 끼치게 된 손실로 2400여 만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법원은 중앙대학교의 일체의 징계처분을 취소한다고 처분하였지만, 중앙대는 기왕에 내렸던 '퇴학 조치'를 취소하고 '무기 정학' 처분을 내렸다가 결국 '유기 정학'으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노영수는 결국 올 해인 2014년, 입학 11년 만에 학부를 졸업했다.

 

그런 노영수가 쓴, 자신이 겪은 두산의 중앙대 이야기이다. 읽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위에 인용한 사건과 이 책에 나오지 않은 사건들을 알고 있다. 중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분위기를 보아 반드시 물어보는 주제이고, 관련된 기사를 찾으면 '교육-대학' 카테고리와 '기업' 카테고리에 분류해 넣어 둔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만 할 것인가. 중대 학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학교 재단도 아니고 그냥 두산에서 바로 모니터링하고 있다든지, 2010년대 들어서는 위에 소개한 국토대장정 행사 참가자에서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든지, 특히 2011년 부총학생회장과 2013년 총학생회장이 임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두산그룹에 입사했다든지 하는 등의 정보는 전혀 몰랐다.

 

이 정도에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두산의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이 아니라 중앙대의 한 교양수업에서 나온 과제이다.

 

'두산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안서를 작성하라'.

 

이런 걸 왜 전교의 1학년 학생들이 다 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두산이 재단이 되어 망해가는 학교 살려놓았으니 너희도 먹은만큼 일하라는 것일까. 이왕 일할거면 돈값 되게 잘 하라는 것인지 두산은 교양 필수 수업, 즉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는 수업 중 인문학이나 예술 및 체육 관련 수업들을 죽죽 줄여나가는 한편 '회계와 사회'를 새로 지정했다 한다.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도 매 주 있는 기독교 행사를 4학기동안 참여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는 대학에 다녔으면서 이런 말 하기는 뭣 하지만, 과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이 '회계와 사회'를 들어야만 졸업을 시켜준다니, 약쟁이보다 무서운 게 돈쟁이라는 평소의 신조가 새삼 실감난다.

 

노영수는 바로 이런 시기에 현장의 최전선에 있었다. 두산과 박 회장의 작태를 고발하기에 누구보다 적합한 경험을 쌓았고, 또 그 경험을 효과적으로 풀어내기에 충분한 필력과 교양을 갖추었다.

 

한편. 그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내가 오롯하게 공감하고 열광하며 독서를 마친 것은 아니다. 특히 책을 읽으며 복잡한 심경이 들었던 것은 그의 방법론에 관한 부분이었다. 대학 본관 앞에 실제로 콘크리트 벽을 세운 것 정도 까지는, 사람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홍보의 측면에서 보면 납득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타워 크레인 시위 같은 경우는 -책에 묘사된 바와 같이- 주변 친구들과 학생회 임원들까지 안전과 부정적 인식을 우려해 말렸고 또한 회의를 통해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도 독단적으로 올랐던 것은 공감하기 어렵다. 본인의 활동이 노영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중대 학생회, 또는 중대 학생 전체의 의지로 파악될 수도 있는데 지인들의 강한 만류나 집단적 합의보다 자신만의 정의와 결기를 내세우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행동을 한 양심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라는 비난을 받는다면 인간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사과하고 거두어 들이겠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악수였다는 주장은 거두고 싶지 않다. 전략과 인내, 그리고 연대가 없는 결기는 정의보다는 치기로 끝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영수의 가장 극단적인 시위조차도 함부로 치기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도 있다. 2011년, 노영수는 대학의 구조조정에 관해 찬성이든 반대이든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중앙대 정문의 잔디밭에 모여 '원탁 토론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학교는 이에 대해 해당 일시가 '시험기간'이며 '잔디밭 훼손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행사를 불허했다. 강의실이나 다른 공간을 빌려서 조용하게, 또 잔디밭도 훼손하지 않게 진행하겠다고 신청하자 학교는 그제야 '정치적 행사이므로 불허'라는 본심을 드러냈다. 이 때, 학교 측이고 나발이고 천 명쯤 되는 중대생들이 정문 앞 잔디밭에 모였더라면, 그리고 조중동은 당연히 안 오거나 오더라도 기사로 쓰지 않겠지만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만이라도 언론을 불러 취재를 하게 했더라면, 두산과 재단은 노영수에 먹이듯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먹일 수 있었을까.

 

지난해 12월 대학가와 사회에 '안녕들 하십니까'의 돌풍이 몰아치던 때, 중앙대에서도 '안녕들 하십니까'에 화답하는 100여 개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 대자보들은 하루 만에 철거됐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인 2014년 5월 7일, 철학과 학생 김창인 씨가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며 자퇴를 선언했다. 그가 자신의 의사를 담은 대자보와 그의 자퇴 선언에 지지 의사를 보내는 16개의 대자보 또한 모두 하루 만에 철거됐다. 한편 한국대학신문에 따르면, 세월호 사건을 대통령 퇴진과 연결시키는 '좌파'들을 비난하는 ‘자유대학생연합(자대련)’의 대자보는 처음 게시된 10일부터 오늘인 14일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있다고 한다. 대자보에 유행어를 쓰든 카카오톡 이미지를 그리든 아니면 항의의 표현으로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백지가 됐든, 한 천 장 정도가 학생회관이나 본관을 덮어 버렸다면, 노영수와 김창인이 '치기'로도 보일 수 있는, 이렇게나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을까. 

 

하기사, H대에서 청소하는 할머니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시위를 하던 때, 반기업적인 대학으로 보여 취업에 방해될 수 있으니 찬성하지 말자는 의견이 더 많던 학생투표도 있었고 시험기간이니 조용히 좀 해 달라고 찾아왔던 학생회장도 있었다. 중대에만 연대를 요구하기에는 가혹한 시대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애들도 다 힘든데 할 수 없지 뭐'하고 살다가, 언젠가 직장인 김창인이 다시 해고를 당했다는, 노동자 노영수가 다시 크레인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게 되면, 나는 무척 부끄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