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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나의 아이들을 위하여

나는 자유직이 아니어도 자유직 비슷한 일을 얻고 싶다. 내 마음대로 시간을 유용하여 쓸 수 있는

직장을 원한다. 선생님이면 좋고 교수님이라면 더 좋다. 번역가나 소설가, 혹은 복권당첨이라면 더

할 나위 없다.


시간은 필요하다. 한참 재미있는 만화책을 열댓권 더 빌려다보며 밤을 새우기 위해, 여름밤 비닐 처

마를 때려대는 빗소리를 듣기 위해, 언젠가는 있게 될 가족들과 함께 옥상에서 오리고기를 구워

먹고 별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나의 시간은 필요하다.


직업만큼이나, 여가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만큼이나 요새는 미래의 가족에 대해 그리는 것이 즐거

워졌다. 분유CF도 어쩐지 따져보면서 보게 되고, 접종은 무엇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등에 대해

말해주는 친척누나의 말에 한참이나 귀를 기울이게 된다.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들도 있으면 좋겠지만, 내 다음대의 돌림자는 필, 그것도 가운뎃자로 돌

리는 통에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멋진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다음대의 돌림자가 필이라는 정보를

얻기 전에도, 나는 워낙에 내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던지라 과연 아들도 나만큼이나 만족해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가 고민했었는데. 필이라니, 원.

그래서 나는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딸의 이름을 같이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여러

이름들을 지어 보는데, 그 일이 나에게는 아주 재미난 유희이다. 일단 이름이 지어지면, 거기에 어

울리는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첫째아이는 나를 닮아 찢어진 눈에 작은 입을 가졌으면 좋겠다. 다소 신경질적이나 태생이 소심하여

큰 사고는 치지 못하고 독서를 좋아하며 가슴은 애석하게도 작은 편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나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피아노등의 악기는 다룰 줄 아는 아이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어쩐지 마

음에 들지 않지만 고대동양사나 별자리등의 이야기를 해 주면 평소의 이성적인 태도는 간데없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듣는 것이 귀엽다. 보물은 책장을 가득 채운 책과 아빠가 스무살 생일에 사

준 가디건-주름 치마세트. 엄마가 사 준 바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에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 나갈 때나 가끔 입어본다. 예쁜 아이이다. 스물한살의 생일 때에는 두꺼운

패드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사 줄 것이다.


언니와 나이차이가 좀 나는 둘째딸은 제 엄마를 닮았으면 좋겠다. 나는 마른 사람을 사귄 적이, 더

정확히 말해 마른 사람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졌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결국 제 엄마를 닮아

좀 통통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내 둘째아이의 보물은 레고.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보물

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어릴때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은 온통 레고로 채우는 아빠의 세

뇌덕분이다. 아마도 아빠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놀아준다 생각하겠지만 아빠의

관심은 오직 레고뿐. 둘째 아이는 여러모로 매트릭스 안에서 사는 셈이다. 취향은 제 엄마를 닮아

바지를 좋아하는 것이 영 아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토실토실한 팔뚝이 드러나는 나시티를

걸치고 멜빵바지를 헐렁헐렁 걸쳐 입은 채 뛰어다니는 모습이 못내 귀여워 아빠는 티를 내지 않으

려 노력할 것이다.


우리집에는 다락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는 아빠와 큰딸의 방. 이삼면이 책으로 가득차 있고

경사가 진 지붕쪽 창문에는 천체망원경이 달린 서재이다. 이곳에는 내 장난감들 중 자석지구본이나

오르골, 퍼즐, 보석함등의 물건을 가져다 놓을 것이다. 복권이 당첨된다면 자그마한 벽난로도 놓고

싶다.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큰딸과 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끔은 카펫에 누워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자라지 않는 가슴에 대해 함께 고민할 것이다. 유난히 가슴이 큰 것을 자랑스레 생각

하는 우리집 대장님 둘째딸의 방은 그 옆이다. 자칫 서재까지 지저분해질 위험이 있으므로 방 사이

를 바로 잇지는 않겠다. 이곳엔 나의 온갖 잡동사니 장난감들과 만화책을 가져다 놓겠다. 방구석에

는 사람 무릎높이의 통이 몇개나 쌓여 있는데, 반은 레고블럭이고 반은 과자이다. 첫째아이가 빈약

한 몸매에 고민하는 것을 보고 걱정한 우리 부부는 둘째아이만큼은 차라리 통통한 것이 낫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초과달성되어 조금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나이먹으면 빠지겠지라고 생

각해 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역시 부정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본인이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인 것은 어쨌든 당장은 다행이다. 덕분에 나도 초콜렛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결국 이 방

도 사실은 아빠의 방 투인 셈이다.


일요일에는 아이들과 학원을 다녔으면 좋겠다. 서예학원이나 피아노학원은 순전히 아빠의 소원이지

만 온가족이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요리학원이라면 아이들도 찬성해 주리라 생각한다. 운동관련 학원

을 제 엄마와 다니겠다면 반대는 하지 않겠지만 학원비는 대주지 않겠다.


가끔 있는 휴일에는 다같이 모여 퍼즐을 맞추고 싶다. 아니면 찰흙으로 뭔가를 만든다거나, 개인별로

파트를 나누어 합주를 해 보고도 싶다. 아카펠러를 해 보고도 싶지만 아빠의 실력이 워낙 비교되게

출중한지라 아이들은 하기 싫어한다. 그림을 그리면, 섬세한 큰딸은 집중해서 정물화나 소묘를 하

고자 노력한다. 아빠는 가슴이 머리보다 큰 외계인을 그려서 둘째딸의 이름을 써 놓고, 둘째딸은

스케치북 가득 과일을 그려놓는데 워낙 실력이 엉망이라 그것이 과일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쨌든 즐거운 휴일이다. TV는 켜지 않는다. 가끔 아빠가 레슬링을 보기 위해 틀지만 아이

들 교육에 좋지 않다며 엄마는 화를 낸다. 어차피 큰딸은 보여줘도 시큰둥한데, 역시나 우리집 대장

둘째딸은 아빠만큼이나 광분하는지라 아빠가 엄마 못 보게 엉덩이 밑에 숨겨주고 몸은 이불로

가린뒤 함께 본다. 하지만 둘이서 기술이름을 외치며 레슬링필살기등을 따라하다가 엄마한테 들키

기 때문에 어차피 혼나는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아빠가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도

록 노력할 것이다. 여기에는 멋진 반전의 결론도 필요없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사랑할 사람을 그려본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난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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