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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수박, <사람 냄새>. 김성희, <먼지 없는 방>

 

 

 

 

 

 

 

 

 

보리 출판사에서 나오는 '평화 발자국' 시리즈의 9권과 10권이다. '평화 발자국' 시리즈 중에서는 <내가 살던 용산>과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를 접하고 또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었다. 특히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에서는 재일동포인 리정애 씨가 일본과 한국의 두 나라 모두에서 타자로 취급받는 현실과 그에 대한 감정의 토로가 생생하게 전해져 그간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던 '자이니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이 시리즈는 '우리 겨레가 겪은 전쟁과 폭력, 일상에 뿌리박힌 차별,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와 인권 들을 아우르'기 위해 기획되었다 한다.

 

<사람 냄새>의 표지에 들어간 로고나 <먼지 없는 방>의 표지에 나오는 방진복 그림 등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책들은 삼성, 그 중에서도 삼성 반도체 공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삼성을 다루는 책이 늘 그렇듯, 귀여운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어투는 비장하고 내용은 무거워 몇 차례나 피곤해지고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책도 어쨌든 상품인데 일껏 만화라는 장르까지 취해 놓고서도 이렇게 불친절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그 얼굴들을 몇 개의 선으로 추상화시키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일까 싶은 말들을 말풍선 안에 같은 글씨체로 우겨넣었음에도 이 정도인 것이다. 두 권 다 사실적인 배경이나 효과음의 사용과 같은 만화적 기법을 극단적으로 제약하고, 정형적인 만화칸 크기와 인물과 대사 위주의 진행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전해지는 내용은 끔찍하고 잔인하다.

 

<사람 냄새>의 주인공은 황상기 씨이다. 그는 2003년 삼성에 입사해 2005년 백혈병에 걸렸고 2007년 스물셋나이로 사망한 삼성반도체 공장의 직원 황유미 씨의 아버지이다. 딸의 항암치료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지만, 삼성은 황유미 씨의 질병을 산업재해가 아니라 개인적인 질병일 뿐이라며 '위로금'을 전달했다. 황유미 씨는 암 치료를 받고 귀가하던 어느 날, 황상기 씨의 택시 뒷좌석에서 사망하였다.

딸의 사망 전과 후에 일관되게, 삼성은 산업재해가 아닌 것을 인정할 것과 사회단체나 언론에 접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하여 큰 액수의 위로금을 제의하였다. 황상기 씨는 이를 거부하고 근로복지공단에 딸의 죽음이 산업재해임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몇 차례나 불승인되자 행정법원에 산업재해 인정 행정 소송을 제기한다.

그런데 피고인 근로복지공단 측 변호인단의 보조 참관인이라는 자격으로 삼성이 지정한 변호인들이 변론을 했다. 이때 삼성이 고용한 법인은 법무법인 율촌과 광장이었다. 로펌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대형 법인들이다. 같은 해 국정감사에서는 근로복지공단이 유가족들에게는 산재 승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한편 소송 초기부터 삼성전자에 행정소송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1년 6월,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행정소송 1심 선고에서 법원은 황유미 씨의 백혈병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황상기 씨는 딸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뒤에도 아직 인정받지 못한 다른 근로자와 가족, 유가족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먼지 없는 방>의 주인공은 정애정 씨이다. 정애정 씨는 황유미 씨와 마찬가지로 삼성의 수원 반도체 공장에서 한 경력이 있으며, 또한 같은 공장의 근무자였던 고 황민웅 씨의 아내이다. 황민웅 씨는 2005년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남편 황민웅 씨는 한 달 이상 지속되는 감기에 병원을 찾았다가 백혈병 판정을 받았고, 골수이식을 기다리던 중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직후 사망하였다.

황유미 씨는 본인과 가족 모두 사망 이전부터 발병이 작업 환경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정애정 씨는 그러한 사실을 2년여가 지난 후 남편의 직장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삼성의 회유와 이전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위해 나선 정애정 씨는 황유미 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를 만난다. 황상기 씨는 딸이 입원해 있던 아주대 병원에 같은 백혈병으로 입원해 있던 청이 있었으며 그 청년에게 아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같은 피해자 가족인 그 아내, 즉 정애정 씨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황상기 씨와 함께 산업재해 불승인, 행정소송 등의 과정을 거쳤으나 <사람 냄새>의 황유미 씨의 경우와 달리, 황민웅 씨의 사망은 끝내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황민웅은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인정되지만,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지 없는 방>의 마지막 부분에 따르면, 정애정 씨는 이 판결이 처음으로 삼성을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다. 현재 정애정 씨는 항소심을 진행 중에 있다.

 

나는 매일매일의 뉴스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골라 즐겨찾기에 추가해 둔다. 위에 요약해 둔 내용들은 <사람 냄새>와 <먼지 없는 방>에서 부분부분 인용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기왕에 '기업'과 '삼성' 카테고리 안에 넣어두었던 기사들에서 가져온 것이다. 말인즉슨, 나는 위의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거나, 혹 잊었더라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새삼 같은 내용을 다룬 책을 읽으며 슬퍼하고 끔찍해 하는 이유는, 기사의 활자만으로는 그 너머의 사람까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2년 3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단체 '반올림'에 신고된 반도체 근로자의 사망은 62건이다. '황유미'나 '황민웅', '황상기', '정애정'의 이름은 내게 이 '62'라는 숫자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건 재벌의 악행, 혹은 기득권을 위한 불합리한 사회 구조 등을 철폐하자는 하나의 강력한 구호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다'나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말조차, 어쩌면 그 어휘들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내 안에서는 구호의 무게조차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책들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냄새>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던 장면은, 삼성이 개인적인 질병일 뿐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계속 잡아떼자 화가 난 황상기 씨가 속초 한나라당 당사를 찾아가는 부분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겠지만, 대기업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고 도움을 받고자 할 때 한나라당에 찾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겠는가? 물론 황유미 씨의 사망이 친삼성적이었다고 하는 참여정부 때의 일이니 행정부나 열린우리당에 가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나라당이라니. 말하자면, 그는 정치인이라면 도와줄 것이라고, 힘있는 사람이 나서면 될 거라고, 그리고 잘못된 일이라면 바로잡힐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 주변의 누군가였을 뿐이다. <먼지 없는 방>에서는, 의사로부터 남편 황민웅 씨의 사망 소식을 듣는 정애정 씨의 모습에서 '유가족의 슬픔'과 같은 단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절절한 감정이 전해졌다. 그날 밤, 그는 남편이 입원한 동안 수시로 자기한테 왔었던 의사가 다가오는 것이 갑자기 불길해서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며 '오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삼성이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삼성이 '부럽다'라는 말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삼성이 '옳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와 같이 생각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