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3

길고 재미없어서 미안.





일요일의 일기다.

아침일찍 과외를 갔다. 금, 토, 일 삼일간 과외를 하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금토 양일간 과외비를

못 받게 되어 초조해 있는 터였다. 다행히 끝나고 나오는데 두툼한 봉투를 건네 주셔서 한시름 놓

았다. 꽤 여유가 있던 요즈음이라 그 마지막의 며칠간 돈이 떨어져 가는 모습에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졸여졌던 탓이다.


뜻이 맞고 시간이 되는 동생들과 인천 유람을 할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는 송도유원지로 소풍을

간다는 컨셉이었으나 흐릿흐릿한 날씨 탓에 아버지가 권해 주신 코스를 따라 보기로 했다.

미리 만나 귤과 족발을 샀다는 후배들과 함께 동인천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 뒤 제물포고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아 그다지 풍광은 좋지 않았지만 스무살들이 뿜어 내는 것보다

더한 꽃향이 어디 있으랴. 오욕의 역사 맥아더상을 관람하고 피아노에 나왔다던 집을 본 뒤 일행

은 애들이 불고 노는 삑삑이를 사 들고 화교촌 쪽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제대로 된

사천 탕수육, 그다지 먹어볼 기회가 없었던 꽃빵과 고추잡채 콤비, 그리고 어제의 첫 술이었던

빼갈 코스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여섯이나 모였는데도 디지털 카메라 하나 없는 것에 어이

없어하며 구입한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택시를 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은(히히) 놀이기구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영종도 행 배를 탔다. 서해가 처음인

지 아이들은 갈매기들의 새우깡 사냥에 열광을 했다. 처음 갈매기들을 새우깡으로 농락한 것이 십수

년전인 나는 그저 먼 바다만 쳐다 봤다.

도착해서 사 두었던 족발을 먹기로 했다. 얼굴이 귀엽게 동그래서 대갈공주, 약칭 대공양의 컨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머리를 감지 못 해 모자를 쓰고 왔다는 말에 그 뒤부터는 똑같이

바지에 재가 묻어도 대공, 대공, 에이 드러, 똑같이 신발이 더러워져도 대공, 대공, 에이 드러.

맘고생이 많았을게다. 수고했어, 두. (두는 만두의 귀여운 약칭)

저녁에 해가 질 즈음 하여 영종도까지 간 김에 한 끼 먹여 두고 싶어 횟집을 찾아 모듬회를 시켰다.

회를 다 집어먹고 매운탕이 나오도록 엉덩이를 달궈 대는 방바닥에 앉아 환담을 나눈 뒤, 집이 먼

친구들이 있어 아쉽지만 모임을 접어야 했다.


초등학생 일기처럼 일어난 일만 나열하는 이유는, 중간중간에 있었던 생각의 흐름들이 일기 하루치

로 쓰기에는 어처구니없이 큼직큼직한 것들이어서이다.

총평으로, 즐거웠다. 어제만 같다면야, 이백살까지도 살 만 할게다.


마침 그림화일로 가지고 있던 오래 된 그림들 중 일기의 내용과 부합하는 데가 있는 것이 있어

함께 올린다. 신윤복님의 그림이다.

'일기장 > 20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약...(...에 들어갈 말이 너무 길다.)  (4) 2003.03.28
결코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1) 2003.03.26
어이가 없다.  (2) 2003.03.23
비가 옵니다  (6) 2003.03.22
2002년 가을, 대전.  (11) 200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