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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근황

제대를 65일 앞두고 드디어 내무반이 없어졌다. 근무지인 공항경찰대 교통계에는 후임들이 있지만,

이들은 실상 내가 있던 부대의 옆에 있는 전경 중대 소속으로, 파견의 형태로 근무를 하고 있는 것

이다. 어차피 하루 근무가 새벽 여섯시부터 밤 아홉시까지이니 진짜 후임과 다를 게 없잖냐고 생각

하기 쉽지만, 같은 내무반에 속한 후임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엄청나다. 재규어 식으로 순위를 매기자

면, 후자는 아마도 솔거노비 정도이지만, 전자는 셀로판 테잎 정도랄까. 만약 기수가 1년 정도 차이

가 난다면, 정말 숨쉬는 걸 빼 놓고는 뭐든지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속해 있는 의경 부대는 작년 6월부터 의경자원감소에 따른 자체소멸 부대로 지정되어 있었다. 말하자

면, 신병은 더 없고 있는 애들 다 제대하거들랑 없애라는 것이다. 하루 중 마주치는 일이십명의 아이

들은 전부 후임이지만, 실제로 소속까지 같은 진짜 후임은 올 12월 제대 예정인 수경 2호봉의 의경

하나. 하나둘씩 제대를 하고 이제는 올해 내에 모두 제대하는 넷만이 남아, 대원 넷 관리하자고

가뜩이나 모자란 경찰 직원 한 명을 배치할 수는 없다는 경비교통과장의 냉엄한 판단 하에, 내일부

터 나는 공항의 지하 1층에 있는, 외근대원들이 근무 사이사이에 대기하는 대기소에서 숙식을 하게

된다.

숙소는 공항 지하 1층, 사무실은 공항 지상 1층. 그야말로 진정한 상주직원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공항내에는 헬스장과 샤워장, 서점에 편의점까지 없는 게 없는 터라 생활조건 자체는

나무랄 데 없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곳이 애당초 '대기소'이기 때문에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시끄럽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하 1층이기 때문에, 1주일 정도 지내면 멀쩡하던 사람도 밭은기침을 하

기 시작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거칠게 항의해 보고 싶지만 지하 1층을 전체 환기하는 데에만 한번

에 천오백만원이 들어간다니 과연 세계 1위 공항 이라고 생각하며 입다물고 있을 수 밖에.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탓에 사석은 물론 이곳에조차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군생활,

혹자는 편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해 오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편한 것

은 사실이다. 6월 한달에만 프렌즈 다섯 시즌 감상과 파이어 엠블렘 봉인의 검, 열화의 검, 성마의

광석 클리어의 대업을 달성했을 정도.) 꼬일 대로 꼬인 채로 어쨌든 꾸역꾸역 채워 왔는데, 이제 와

서 더 나빠져 봐야 그게 그거지, 얼른 집에나 가자 하며 참을 뿐이다. 참고 또 참는 것, 공항경찰대는

나를 참된 군인으로 키워 주었다. 박정희가 봤으면 참 유신 훈장이라도 줬을 것이다.


창천항로 33권이 빨리도 나왔다. 어차피 내용이 조조의 일생이라, 죽을 때쯤 되면 끝나겠지 하고 당

연한 예상은 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34권으로 완결이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한다. 순욱이

죽고 순유가 죽고 하후연이 죽었으니 슬슬 조조 차례라 생각은 하지만. 열성을 가지고 수집하는 만화

가 종결되는 것을 보는 것은 두번째의 일이다. 첫번째는 저 위대한 <아기와 나>.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여름맞이 추리소설 40% 할인 이벤트를 시작했다. 흑흑. 레이몬드 챈들러의

책을 산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이래서 인터넷 샤핑 몰은 얄궂다니까. 텐바이텐에서도 한두번

당한 것이 아니다.

새로 보이는 이름은 제해 놓고, 헌책방에서 발견하면 꼭 사 둬야지 하고 생각했던 책들만 모아 놓아

도 얼추 십만원. 정말이지 복권이 간절하다. 교보문고 사장 손녀라도 어떻게 친해질 방법이 없을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 세권과 <과학으로 여는 세계의 불가사의> 세권. 할인에 할인을 거듭

해 줬는데도 6만원이 훌쩍 넘는다. 미안. 70만원쯤 있을 줄 알았던 저금통에는 딱돈 60만원이 들어

있었다. 월급을 받는 나머지 두달동안은 정말 라면만 먹고 살아야겠다.


다음주면 드디어 60일이 깨진다. 슬슬 끝이 보이는구나, 생각하니 설렘 반, 한숨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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