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2

근황

제 1장.

카튜샤가 어디더나. 집안에 돈도 없고 빽도 없어 심심치 않게 이 놈은 저거로 빠졌다더라, 저 놈은

이거로 빠졌다더라 소리 들어가면서 그나마 한 몸 온전히 보전하며 군대 다녀오고 싶은 가련한 청춘

들의 마지막 탈출구 아니더냐.  별로 건강한 것 같지도 않은 이 놈의 몸뚱아리는 어쩌자고 1급을 받

은 것인지...



그 카튜샤를 지원했었다. 군대라는 것이 워낙 남의 이야기같아서 10월의 후반까지도 발표가 언제

나든, 뭐로 나든 관심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던 것인데. 막상 발표가 된다더라 하는 날이 다가

오니까 컴퓨터 즐겨찾기에 카튜샤 커뮤니티들을 줄창 등록해 놓고 하루하루 올라오는 글들에 일희

일비하였다.



지난주에는 식겁할 만한 일이 있었다. 어떤 녀석이 누가 테스트해 봐도 떨어졌다고 나오게 되어

있는 국방부의 한 확인프로그램을 카튜샤 합격 확인 프로그램이라고 링크시켜 놓은 것을 건드렸던

것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좋아하는 동기 두명과 밥을 먹을 것도 침울한 목소리로 먼저 내려간다고 하

고 지나쳐 버렸다. 이렇게 적는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물론 루머였다. 어떤 사람은 병무청에 전화

까지 해 봤단다.


여하튼 그 날은 떨어진 줄 알았으니까. 정말 그림처럼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차가웠고 그 며칠 전까

지만 해도 깨끗하던 백양로에는 낙엽이 수북하니 덮여 있었다. 어떻게 하지. 떨어졌으니 현역이라도

빨리 지원을 해야 할까. 아니 이렇게 된 거 학교 다니기 꽤 재미있는 요즘인데 1년 더 다닐까. 아니 어

차피 더 다닐 거 끝나고 장교로 갈까. 아니 이렇게 된 바에 대학원이나 갈까. 가서 워커 신고 농구 하

다보면 나도 혹시 공익으로 갈지 누가 알아? 아냐, 큰 마음 먹고 비디오 가게 차릴 만한 돈 벌어서 LA

로 혼자 이민을 갈까? 군대 갈 것 없이.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어른들은 물론 기회가 많으니 좋은 거라고 하시겠지만) 내 20대가 이렇게 불

투명한 것인지, 이렇게 내 잠깐의 판단으로 쉽게 결정지어질 수 있는지에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20대여, 영원히, 라고 생각하다가 이런 진지한 순간에 그런 애같은 소리라니, 하고 풋 웃고 나서

그걸 '애같은 생각'이라고 슥 제쳐 놓는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놀랐다.



제 2장.

그것도 힘들다구. 난 어려요,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해 보이고, 네, 네, 나도 다 알아요, 난 어른이라구

요, 하는 건 너무 애늙은이같아 보이니까. 어쩌라는거야.  




제 3장.

오늘은 엄마와 쇼핑을 갔었다. 요새 폴라가 갖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가 큰 맘을 먹었던 모양이다.

또 지오다노였지만. 글쎄, 사람들하고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난 지오다노 별로 안 싫어하는걸.

지오다노 아니면 내가 살면서 무슨 재주로 폴로 비슷한 옷을 입어 보겠어. 꼭 한 벌 정도는 있으면 좋

을 법한 베이직한 스타일의 옷들도 지오다노 덕분에 겨우 한 벌씩 있지만, 있는게 어디야.

그리고 엄마와 백화점 내에 있는 E-MART에 갔다. 거기서 파는 닭고기가 맛있다는 소리를 한 뒤

로 엄마는 그곳에 자주 간다. 가방을 맡기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새로 산 옷을 담은 봉투가

사물함에 맞지 않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나는 계산하는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귀에

들리기 시작한 '넌 감동이었어'라는 노래의 바이브레이션 포인트가 어디일까 일일이 불러보는 것으

로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엄마가 책을 사왔다. 다른 식구들이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집에서

'책을 읽는다'라는 건 주로 나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약간 의아해 하고 있는데, 엄마가 나에게 책을

건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였다. 어제 엄마와 밥먹으면서 얘기를 하다가 그 작가 얘기가 나왔

는데 엄마가 다른 작품들은 다 사서 모으면서 왜 그건 안 사니,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왜 안 사

긴, 요새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학교서점에서 서서 다 읽었다구.  그 말이 엄마 가슴에 얹

혀 있었나 보다. 야, 엄마, 감동이었어.


나는 일부러 만화책을 빌려 왔다. 5시부터 9시쯤까지는  TV로 피할 수가 있지만 그 뒤에 할 일이 없

으면 기다리다 못 해 '뇌'를 읽을 것이 뻔하고, 그러면 좋아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시간에 읽지 못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시간이란 -언제 자든지- '자야지'라고 생각하고 침대로

들어가 책을 펼쳐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홉시에 읽기 시작했다가는 열한시나 열두시쯔

음해서 다른 책을 찾아 책장이 있는 동생의 방에 몰래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  열시나 열

한시쯔음이고, 읽지 않은 책이 -그것도 시리즈로- 있다면, (아주 부차적인 것이지만) 간식까지 있다

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동생이 수능때라서, 몰래 훔쳐다 먹어도 모를 정도로 방대한 양의 간식이

집안 이곳저곳에 널려 있어서 오늘밤은 그야말로 페스티브해질 것이다.




제 4장.

이렇다. 군대와 20대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들. 그러나 그렇게 계획대로 무시무시하게 척척 나아

갈 것 같은 '인생'은 사실 들여다 보면 이렇게 사소한 날들의 모음인 것만 같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고.


20대뿐 아니라 30대의 향방도 그렇다. 직업도 그렇다. 너 좋아하는 일들만 하고 살래, 애O끼(원래는

쓰기에 그다지 거부감 없는 말이라 그냥 적었지만, 이 홈페이지에는 등록하기 적합하지 않은 단

어를 걸러내는 기능이 있다. 아니, 주인은 마음대로 쓰게 해 줘야 되는 거 아냐?) 과외비

는 뭘로 댈거야? 자식도 돈 없이 키울 거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래, 회사원이나 뭐 하여튼 안정

적인 봉급을 타는 직업을 가져서, 적금 부어가면서 살자.      하고 생각하다가


과연 너라는 개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이냐. 자기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도 모르게 사회 상

부가 만들어 놓은 매커니즘 속에서 체제를 굳히는 개미역만을 하며 살아갈 터이냐. 무대 위에서 느꼈

던 희열과 오르가즘을 잊었느냐, 라고 들어보면, 그렇지. 그렇지. 그토록 힘들었던 10대도 돌아보면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이토록 빨리 지나가는 20대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죽기 전에

무엇을 추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제 5장.

고등학교 때 쓰던 일기장을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윗사람들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윤리책에서 봤던 청소년기의 특징 그대로이다. 청년기의 특성들을 분석해 놓은 책 속

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고통스런 자기탐구로 헛된 열정을 낭비할 수 있는 시기'.


몇년이 지난 후에 이 일기를 다시 보았을 때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

로도 재미없어진다.  




제 6장.

야, '넌 감동이었어' 대박이다. 이제 닭고기 먹으면서 만화책이랑, 뇌 읽어야지.




제 7장.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는거야?

'일기장 > 20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길  (2) 2002.11.05
아아  (2) 2002.11.04
붉은 낙타  (3) 2002.11.02
11월 1일, 11시 1분.  (2) 2002.11.01
11월의 첫 새벽.  (0) 2002.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