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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과학하는 마음 - 3 발칸 동물원 편






기웅이 형이 번역하고 연출한 <과학하는 마음>을 보고 왔다. 히라타 오리자의 원작은 3부로 이루어

져 있다는데, 이번에 본 것은 그 중 세번째 작품인 '발칸 동물원' 편이었다. 워낙 기웅이 형의 작품들

을 내내 좋아해 온 편이었지만, <과학하는 마음>의 두번째 작품을 미리 보았던 진섭군의 혹평이 있

었기 때문에 복잡한 기분이었다.


운전면허 기능교습을 끝낸 뒤 대학로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였지만 엄청나게 추운 날씨 탓

에 둘러볼 생각은 하지도 못 하고 동행인 진섭군과 잽싸게 배를 채운 뒤 짜가 비타 500을 사 들고

아르코 극장으로 들어갔다. 기웅이형을 어떻게 만날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형이 마침 로비에서 일찍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어 고민을 덜었다. 짧은 이야기를 나눈 뒤 의자에 앉아 팜플렛을 읽었

는데, 대체로 칭찬 일색이기 마련인 소개글등에서까지 뭔가 정형적인 연극은 아닐 듯한 느낌을 받았

다. 사실 몸살 기운이 좀 있었는데도 기웅이 형의 연극이라 꼭 보고 싶어 억지로 서울을 찾은 것이

라, 재미있어 주길 다른 때보다 한층 더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은 더해만 갔다.


입장을 하자 무대에는 이미 배우 한 명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컴퓨터 검색을 하기도 하고 신문을

읽기도 하는 등 웅성웅성 입장하는 관객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상적 연기였다.

저 연기가 언제 깨지려나. 깨지려면 안 나오는 게 나을텐데, 두근두근두근.


결론부터 말하면, 그 '일상적'인 연기는 끝까지 깨지지 않았고 동시에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내용 자체는 생물 연구소 -동물원?-에서 조교수와 연구원, 학부생등이 뒤섞여 생명과학 정보나 거기

에 관련된 윤리에 대한 잡담을 나누는 것이 전부로 극적이라고 부를만한 사건은 전무했다. (이 연

극의 장르는 자칭 '과학극'이다.) 결국 '수다'가 다였던 셈인데, 무대가 넓은 편이긴 했지만 두군데,

어쩔 때는 세 군데 이상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통에 애당초 그런 극이라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극

초반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배우들의 발성이나 발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주요한 사건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필사적으로 따라가려 애쓰는 내 태도가 문제였다. 극작가는 팜플렛에서 그런

태도를 버려 달라, 는 취지의 주문을 했는데 사실  로비에 앉아 그 부분을 읽은 진섭군과 나는 맹렬한

비난의 말을 숨기지 않은 터였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과 공간 내

에서,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즉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도대

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그 일상을 재단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 아닌가.

재작년 무렵부터 홍상수에 물리고 물려온 뒤라 비판의 날은 더욱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

하는 마음>의 제 3편은 그간의 그러한 생각을 고치기에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중언이 되지만,

'생명과학'이라는, 무대에서 접하기엔 생소한 주제와 사건 없는 진행 등에 몰입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사실적인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관계의

호흡이었다. 선배와 후배, 선생님과 제자, 친구사이, 연인사이등 일정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

들이 그 관계의 특성을 보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일상에서도 무척 재미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무대에서 실연되었을 때에 관객의 기대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는 의문이었는데, <과학

하는 마음>은, -특히 진섭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번의 3편은 - 인상적인 결과를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연기란, 이토록 재미있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연극을 너무

많이 봐서 '극적인' 연기와 작위적인 플롯에 신물이 나 있던 터라 이 작품의 연기를 더 좋아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라고 진섭군은 평했다. 나는 진섭군만큼 연극을 많이 보지는 못 했지만, 그 말도 옳

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배우 하나하나를 떼어 놓고 보았을 때 일상적이냐 극적이냐의 수준이 아니라 애

당초 배우로서 갖고 있어야 하는 자세, 화술 등의 기본적인 면에서 결점이 있는 연기자들이 있긴 했

지만 열댓명이 넘는 인원이 일관적으로 자아내는 분위기 아래에서는 대체로 용납이 되었다. 지속하

여 나오는 이 '분위기'에 대해 진섭군과 나는 근래 본 연극 중 연출의 존재가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극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비록 직업인으로서 등의 철저한 동기의식이 부여되지 않은 학부생 배우들

이긴 하지만 아무튼 열명이 넘는 크루들을 데리고 연출을 하면서 엄청난 좌절감을 맛보았던 나로서

는 더더욱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좋은 연극 봤다. 진섭군이 연극이 끝난 뒤 형과 가벼운 술자리를 약속해 두었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형은 깜빡하고 있었는데 꼭 가야만 하는 더 중요한 자리가 있다며 가 버렸다. 말하자면 바람

을 맞은 셈인데도 진섭군과 나는 재미있는 극을 본 흥을 식히지 못 해 신촌으로 돌아와 각자 헤어질

때까지도 한참을 주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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