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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고민

근래에 있었던 생각이다.


극본 [고백]의 결말을 맨 처음으로 마무리지었다. 어차피 써 나가면서 충돌이 생기는 부분을 고쳐야

하므로 가장 많이 변하는 부분이 되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은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선이라 아마도

변하지 않을텐데, 그 부분 중 한 씬을 놓고 무척이나 고민했다. 미리 말해두면 이 곳을 드나드는 사

람들이 나중에 직접 극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덜해지겠지만 어차피 무대위에서 실연하는 것은 몇년

후가 될테니 괜찮겠지. 남자 주인공 셋 중 둘의 키스신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정말로

먼동이 터오는 가운데 삼십여분간 꼼짝 않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민만 했다. 두 역 중 하나는

작중의 내 페르소나 같은 존재라 만약 상황이 허락한다면 꼭 내가 연기해 보고 싶었던 캐릭터였다.

덕분에 키스신을 넣기로 결정하면서 결국에는 연기를 포기해야 했지만, 아무튼 가장 컸던 고민은

남들이 날 게이로 보면 어쩌나였다. ( 남들이 게이로 보지 않을까라고 고민하는게 이렇게까지 쪽팔

리다니, 안됐다 챈들러.) 동성애클럽같은 데에서 명예회원 자격이라도 주고 강연해달라면 어쩌지.

어찌 보면 여성을 비하한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도 고민스러웠다. 여성인권신장회

같은 데에서 당신이 이거 쓴 사람이야?라고 극본 들고 집으로 들이닥치면.


글 쓴지는 좀 됐는데 왜 이제서야 그걸 고민하느냐고. 고민한 적은 있다. 그렇지만 그건 문학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학도로서 고민하는, 뭐랄까, 당장 내 목젖에 와 닿아 있지 않은 '배부른 고민'이었고,

막상 쓰고 있는 것으로 '금기'에 도전하려니 이젠 좀 절실해진 것이다. 내가 쓴 글들 중 금기에 도전

하는 물건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히트작 '주안동정남'을 읽어 보신 분들은 여기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으시겠지만, 정면으로 도전한 것과 웃음을 곁들여 휘휘 둘러간 건 애시당초 다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일일이 물어본 것도 아닐테니,

결국 내가 생각하는 '금기'라는 건 내 의식의 한계이지 않은가. 사실은 이게 좀 타격이 컸다. 물론 그

렇다고 동성애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난 워낙에 열렬한 가슴교 신자임이 유명하니 달리 변명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무튼 글 쓰는 놈이 되어서 기준이 많다는 건 별로 유리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 난 좀 기준이 많은 편이다. 보수적이라는 말로 잘 포장하고 있지만 내가 그어 놓은 선 저

쪽의 사람은 좀처럼 보지 않는다.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친구들은 이제는 지겨워서 지적조차

하지 않는 나의 일면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창작활동을 통해 그걸 역으로 지적받고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에는 아침 여덟아홉시에 취침해 저녁 대여섯시에 일어나던 생활을 좀 바꿔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하루 중 가장 왕성히 활동하던 열두시 근처부터 침대에 들어가 억지로 자려 노력하느라고 책을

몇권씩 읽어대는데, 덕분에 사서 몇 번 읽지 않고 처박아두었던 정비석의 소설을 좀 가져다 읽었다.

고민하던 차에 읽어서 그런지 에이씨, 에이씨하고 가슴이 선득선득했다. 기준이 많은 작가의 글이란

얼마나 유치한가.


그 혼란스런 와중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관한 글을 읽었다.  '트로이'나 '투마

로우'등, (난 아직도 왜 이 영화의 한글제목을 '투모로우'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용은 볼

게 없고 눈만 즐겁기 때문에 효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들

이 늘어감에 따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다.

(여담이지만 어지간한 일리아드 팬이거나 브래드 피트의 팬이 아니고서는 트로이를 권하고 싶지 않

다. 우리나라 연예인과 닮은 꼴 할리우드 스타를 찾고 싶다거나 반지의 제왕이 아닌 다른 영화에서

레골러스를 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한다.)

어쨌든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은 놓고 있지 않는 가운데 매주 보는 저가영화지 '무비위크'에서

관련기사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영화중에 '빨아 줄래?'라는 대사가 있다는 부분이었는데,

그 글쓴이가 쓰고 싶었던 건 뭐 좀 다른 얘기였지만, 아무튼 난 그 대사 하나만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다니! 가 아니다. 성경험에 관한 한 그리 좋지 않은 내 기억만으로 해도 내 입으

로 그 말을 한 걸 세어 보면 손가락만으로는 모자란다. 어쩌면 발가락까지 써도 모자랄지도 모른

다. (단언컨대 머리카락보다는 모자란다. 그러니 너무 샛눈으로 보지 마시라.)


실생활에서 멀쩡히 쓰고 있는 말을,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에 썼다고 해서 거기에 충격을 받다니.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물론 그 대사가 성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취급을 받는 오럴 섹스에 관한

것이고, 그 대사를 취급한 이가 별 의미없는 말이나 장면을 써도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에 의해)

추앙받는 홍상수 감독인 것은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만 독자나 비평가가 아니라 글쓴이의 입장에

서고자 하면서, 작품을 쓰면서 비평받지 않을까 고민하는 건 둘째치고 쓰기도 전에 스스로의 검열에

걸려 쓰지 못 하는 것들이 있다면 불행한 일이다.


좀 더 용감해져야 하겠다. 마교수님은 이런 날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사실은 상담을 요청하기도

부끄럽다. 아무튼, 근래에 가장 큰 화두였기에 적어두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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