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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개학






인용 문구에 각주를 달기 위해 책장에서 책을 꺼내려고 하는데, 거미 한 마리가 뽑을 책의 근처에 앉

아 있었다. 비키라고 책장 아래 부분을 툭툭 쳤는데도 거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김으로 몇 차례

불어보고 나서야, 죽어 있음을 알았다.


아는 거미였다. 뻥치시네, 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연구실에만 열댓 시간을 앉아 있다보면

책만 붙잡고 있더라도 책 바깥의 많은 정보들을 습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몇 시쯤 되면 수위 아저씨

가 순찰을 도니 귀신 발소리와 착각하지 않아도 좋은지, 외솔관 뒷 산의 새들은 몇 시쯤 일제히 울기

시작하는지 등등. 죽은 거미는 방학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나타나 왕성한 속도로 거미줄을 치기 시

작했다. 처음의 며칠동안은 주목해서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만한 곳에 줄을 치고 있더니만, 얼마

후부터는 자주 사용하는 책장은 물론 책상의 바로 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 진취성과, 하룻밤 지나고

오면 어느샌가 튼튼하게 실을 자아내는 근면성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본의는 아니지만 이번 방학이

책상 위에서의 학업보다는 그 바깥에서의 잡기로 채워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도 있어, 나는 어지간히

방해가 되지 않으면 거미줄을 그대로 두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되는대로 공부하거나 놀고싶은 만큼 놀다가 쓰러져 자는 생활도 슬슬 끝나고, 기껏해야 여행 계획

이나 사람들 생일 정도가 드문드문 적혀 있던 윗부분과 달리, 8월 달력의 아랫부분은 수강신청이나

등록, 연구원 오리엔테이션 등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일정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시 한 번 스케쥴

을 정리하고 개강 준비를 하기 위해 저녁 느지막히 연구실에 왔는데, 거미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깐 서글프기도 하고, 방학 동안만 잠깐 만나 엄청 친해졌지만 이제 헤어져야 하는 다른 동네

의 친구 같다는 따위의 생각 등을 하기도 하며 거미를 쳐다 보다가, 문득, 마지막까지 맡은 일을 소

신껏 하다가, 살아 있던 모양새 그대로 사람 눈 띄는 곳에 당당히 죽어 있는 그 모습이, 무척, 멋있

고,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치우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여름방학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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