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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ㅣ연극과 인생ㅣ 제 21회 정공연 [크라바트] 연출의 글 (1차 보완)

제대로 첫 연출을 맡게 된다면, 꼭 내 손으로 쓴 창작극을 올릴 것이다, 라는 것이 연출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하면서부터의 꿈이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첫 장작극 '최근의 대마왕은 호모래'

는 접게 되었지만, 골방에 틀어박혀 주위에 사탕껍질을 수북하니 쌓아가며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것과

관객이 감상하게 될 시청각적인 결과물을 예상하며 글을 쓰는 것은 아주 약간 다른 작업이었다.


혼자 읽는 일기이든, 비평을 기다리게 될 작품이든 오로지 나의 세계 안에서 나오는, 글이라는

물건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글을 쓴다는 건 거울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고 혼자 웃고 마는

일기와는 다르다. 쓰다가 보면 결국 나라는 사람을 타자의 시선에서 보면 어떻게 되는가, 라는

메타결론에 종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수많은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모든 질문들의

끝에서,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로, 결국 나에게로 회귀함

을 깨닫고 한참동안이나 좌절감에 꼼짝 못 했던 기억이 난다.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는 엄청나게

건방진 시도였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연극 [크라바트]를 준비하면서도 이 질문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크라바트]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왜 이 작품을 올렸느냐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가.


이런 얘기를 해 보자. '크라바트 이야기'는 지금의 독일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어딘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이다. 내가 극화의 원작으로 삼았던 것은 이 전설 자체가 아니라 이 전설을 기초로

하여 완성된 오토프리트 프러이슬러라는 아저씨의 소설이다.

이 아저씨는 원래 동화작가다. 혹시나 싶어 뒤져 보았던 어린 시절의 책장에서, 책장에 김치국물이

묻어 있을 정도로 평소에나 식사 때에나 끼고 살았던 책들 중 몇 권이 그의 작품인 것을 발견하고는

꽤나 놀랐다.


더 얘기를 해 보자. 동화는 이른바 '닫힌 이야기'이다. 갈등이나 화해의 요소요소가 어떤 연령의, 어떤

개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다, 라는 거다. 미하엘 엔데나, 죠반니노 과레스끼

등의,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작가들도 대개 그런 특성을 가진 글을 쓴다. 어떠한 성향을 가진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는 건, 내가 그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 보자. '닫힌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그저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사적으로 주제문을 찾으려 하거나 교훈을 알아내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짓을 하는 건 수능을 봐야 하는 고등학생들과 걔들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뿐이다. 꼬마들에게 이 동화

를 읽는 이유는 나쁜 짓을 하면 벌받으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걸 꼭 외워 두는 데에 있다고 말

하고 책을 쥐어 주면 금새 내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나도 관객 여러분에게 어떤어떤 점을 유의해

가며 보시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며 이런이런 걸 생각해 보시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나도 국문학과인 것을 악용해 언어영역 과외를 하고 있지만 말씀이다.)


그래서야 골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뭐가 다르냐, 라고 물어오면 나는 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

할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숙명적 존재인 인간에 회의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라고 고백해 오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떡일지도 모르겠다. (속으로는 앞으로

상종 못 할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결국에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차이를 구분해 내는 것마저도 관객인 여러분에게 돌린다. 무책임하다고 말씀하지 마시라.

그런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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