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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8월 4일, 後半

동교동에 이르러, 서울로 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좆이 입에서 천 번쯤은 난 여대생들의 앞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날이 더운 탓인지 해가 쩅쨍한 다섯 시 무렵인데도 백양로에는 사람이 없었다.

야식으로 산 던킨 도너츠의 봉투를 휘휘 돌리며 걷고 있는데, 중앙 도서관을 지날 무렵에 삼거리 근

처에서 작은 옆가방을 든채로 주위를 둘러보는 여자분이 눈에 띄었다.


공격적인 기독교 신자 혹은 증산교 신자일 것이다라고 내 안의 왓슨은 다시 한 번 냉철한 추리를 펼

쳤다.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아무튼 정답은 대순진리교 신자였으니 그리 틀린 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처에 이르자 여자분은 자신은 '공부를 하는' 사람인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말을 걸어

왔다. 어차피 긴 백양로를 걷느라 몸에서 땀이 나던 차에 잠시 앉았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

어 그러마고 했다. 빈 벤치를 앞서 찾는 여자분은 삼십 대의 초중반으로 보였다.


자리에 앉고 나서 잠시간 내 이름이나 나이등을 묻던 여자분은 갑작스레 음과 양, 원형리정과 12사

도, 72현, 500나한 등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딘가의 신도임을 확신한 것은 '우주의 가을'

운운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참을 듣고 있는데, 화술과 내용에 있어 지적할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일단 원개념과 연관성

이 적은 조악한 비유를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고 있었고, 일반인인 내게 추상적인 개념어들을 일방적

으로 늘어놓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식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지식인의 자세는커녕 상대방의 의

견이나 참여도를 고려해야 하는 토론자로서의 기본 자세조차 갖추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듣고 있기가 어려워, 대화를 토론 식으로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 <중용자잠>

에 관한 논문에서 성리학의 사유체계 부분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원형리정元亨利貞 등

과 같은 유학의 핵심개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남용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는데, 돌아온 것은

공격적인 반응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긋나긋한 말투로 우주의 원리를 주무르던 그녀는 내 지적을 듣

더니만 돌변하여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느니, 개미에겐 3차원이 보이지 않듯

이 인간에겐 4차원이 보이지 않는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동시에 식상한 모순을 실현하는- 이야

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애시당초 지식을 전달하려는 양 굴지 말고 신앙을 말했더라면

좋지 않았느냐.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에서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 하는 개념들을 마구

잡이로 늘어놓으면 어떡하느냐. 등의 지적을 하자 여자분은 잠시간 나를 쳐다보더니 '머털도사 본 적

있어요?'라는 질문을 해 왔다.


그것을 새로운 화제의 전기로 삼고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 했을 그녀의 의도에 미안하게도, 나는 머털

도사를 본 적이 있다. 이천일 년, 눈이 펑펑 오는 정신나간 사월에, 인천 터미널 앞에서 조상신이 세

보인다는 남녀의 말에 문화체험을 해 본답시고 내 돈 내고 동인천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 허름한 건

물의 2층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바나나킥과 양파링이 바쳐진 신주를 향해 세 번이나 절하고는 일금

오천 원을 헌납한 뒤 한 시간 동안이나 시청각교재를 시청한 뒤에야 풀려났던 적이, 있는 것이다. 우

주의 가을을 예고하는 그 시청각교재가 바로 머털도사였다. 오 년 전쯤 고갈비를 먹으러 동인천을

찾았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그 건물에는 대순진리교 인천동부지부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었다.


'혹시 대순진리교 신도분이십니까.'라고 묻자 여자분은 눈에 띄게 신경질을 내더니 내 어리고 건방진

영혼에 축성을 내린 뒤 자신은 바쁜 일이 있다며 가 버렸다. 나는 계속해서 작아져 가는 그 뒷모습

을 쳐다 보며 도너츠를 하나 꺼내어 천천히 다 먹고는 저런, 못된 년 같으니, 하고 중얼거리며 연구

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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