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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8월 4일, 前半

애당초 늦게 일어난 하루였다. 흐릿한 하늘 사이로 드문드문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서야 눈을

감은 것이니 오후 두 시가 넘어 일어났지만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하루의 시작이 남들보다 조금 더

더운 것 뿐이라고. 기실 자신을 설득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지난 주 토요일부터 시작한 다산 정약용의 <중용자잠>강의는 정말 끝내줬다. 아침 아홉 시에 시작

하는 강독회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새벽 두 시에 시작한 하루였는데도, 세 시간의 수업이 끝난

뒤 허둥지둥 점심을 먹고 바로 연구실로 들어와 복습을 시작할 정도로 즐거운 수업이었다. 쓰러질 때

까지 할 수 있는 공부였지만,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동기인 재만이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생각

이 나 오랜만에 전화해 본 주희가 근처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길래 주희의 랩까지 함께 들고

간 뒤 거기에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 잠깐 나누자는 이야기가 즐거워 계속 이어지다 마침내 주희

가 볼 일이 있다는 교보문고까지 나가게 됐고 근 한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는 발바닥의 티눈이 성화

를 부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헤어지기 전에, 이청준씨의 작고소식에 적지않이 마음을 쓰고 있던 나는 엄마에게 줄 꽃을 한 송이

샀는데, 이유를 물어보던 김주희 여사께서는 이청준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없는

벽의 작가?'라고 말씀하셨다. 정답은 '소문의 벽'. 같은 '소'자로 시작할 수 있는 이름 중에 가장 먼

답이 아니었을까. 이래서 김 여사의 냉혹한 언사에 종종 상처받으면서도 팬클럽에서 탈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무튼, 이러구러하게 미뤄진 <중용자잠> 복습이었던 것이다. 대체로 즐거운 공부생활이긴 하지만

학교 가는 길까지 즐거울 정도의 일은 많지 않다.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가고 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한 인도남자가 오가는 사람 사이

에서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서 있다가 그를 응시하며 지나가는 내게 다가왔다. 손에 파일을 들고 있

는 것을 보아 아마도 기부프로그램의 자원봉사자일 것이다라는 나의 추측은, 비록 난이도는 홈즈가

아니라 왓슨급이었지만 여하튼 적중했다.


그래도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만난 인도인은 몇 되지 않았고, 그 중 영어를 쓸 수 있는 이는 처음이

었던 탓에 한참이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한국인의 눈에는 마흔 쯤으로 비춰졌고, 다른

문화를 경험해 본 내 국제적 세련미의 눈에는 서른 너덧 쯤으로 비춰졌던 그 아저씨는 86이었다.

델리 대학을 졸업하고 커리지를 쌓고 있다는 그의 말은 강한 인도식 억양 때문에 알아 듣기가 다소

어려웠지만 오랜만에 바라나시나 갠지스 등의 이름을 듣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Take care'라는 마지막 인사에 '나마스떼'라고 답하자, 그는 돌아서던 몸을 다시 내 쪽으로 향하고

는 마침내 86쯤으로 보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마스떼'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을 나서면서, 생각해 보면 어릴 때의 여름방학이란 하루하루가 기대감과 흥분으로

가득했었는데 그때보다 더 시간과 돈이 많은 지금의 여름방학은 무엇이 문제라 이렇게 뚱해진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마침 무척 좋아하던 산책로가 눈에 띄었는데, 매일 오고 가는 길에

서 '오랜만에' 그 길이 눈에 띈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 길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도 한 시간쯤 그리로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와 다른 것은 인도 청년과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지긋지긋해 하

며 지나다니던 터미널조차 구석구석의 풍경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사유의 경계란 이렇게나 쉽게

깨지는 것인가. 한편 이렇게 강력한 것인가. 나는 사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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