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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80년 언젠가의 밤




-털스웨터와 고르뎅 바지를 입고 눈싸움을 하던 그 때에.



히메나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파파스머프와 모래요정 바람돌이 아저씨도 잘 지내고 계시겠

죠?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녁 다섯시 여섯시마다 꼬박꼬박 찾아 뵙던 저도 어느덧 스물두살이 되었습니다. 한달만 더 있으면

스물세살이지요. 어쩌면 히메나 선생님이 처음 부임할 때의 나이와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아무튼 너무 오랫동안 선생님을 잊고 산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시장 가운데에 있습니다.  시장 내에 있어 시끌시끌하고, 아주 사람 사는

냄새 나는 곳입니다. 시장가 주택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시절 그 때의 골목길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이곳엔 아주 많습니다.



비디오를 가져다 주러 나가는 길에, 더 가깝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긴 하지만 괜스리 걸어보고 싶어

져 시장을 가로질러 가던 평소와는 달리 골목골목을 통해 가보았습니다. 조그만 가로등은 가운데

마름모 마름모가 그려진 바닥 블록들을 주황색 그대로 비추어주고 있었습니다.  격자로 된 어느

창문 안에는 여드름이 살짝 난 여학생이 꽁지머리를 만지작만지작 하며 문세 아저씨의 별밤 시그널

송을 듣고 있을 것만 같고, 사연많은 메밀묵 아저씨가 슬슬 목장갑을 끼고 일을 나갈 차비를 하는

모습과 마주쳐도 아무 의아함 없이 지나칠 것 같은 밤. 오늘 살짝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저

차의 뒤에는 분명 EF쏘나타라고 적혀져 있건만 저는 우리 집의 첫 차였던 팥죽색 르망을 추억하였

습니다.



선생님. 그 광경에서, 그런 광경이 있던 때에 이 시간대에는 집안에 있어야 했던 저는 어느새 하릴없

이 동네를 굼실굼실 돌아 다니는 20대 동네청년이 되었습니다. 이런 날이라 감지 않은 머리가 한가

닥 삐쳐 있는 것이 더욱 마음 편해 좋았습니다.



다녀 오는 길에 문구점을 들러 보았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저에게는 한 때 열혈 조립소년이었던 때

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100원짜리는 조립기술이랄 것이 없어 200원짜리만 조립하다가 처음

500원짜리를 조립하던 날, 실수로 로보트 팔을 부러뜨리고 울던 그 날.

지금도 먼지가 소복히 쌓인 그때의 조립품들을 보면 사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세월이 지나 가격표

를 몇번씩 덧붙인 자국들이 먼지의 두께차로 인해 보이지만, 그래도 가격이 야박하다고는 할 수 없을

만큼만 올라 있기 때문에 흐뭇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찾아낸 문구점은, 선생님, 그야말로 천국

이었습니다.



예전에 뽀빠이(세상에, 뽀빠이! 80년대의 소년들이여!)의 상무였다던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문구점

에는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어린날의 꿈들이 당장 제 주머니안에 있는 돈만으로도 해결 가능한 명찰

을 달고 가지런히 먼지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뽀빠이의 상무였다던 아저씨의 과거가 오늘밤 전혀

어색하지 않아 스스로 우스웠습니다. 그때의 그 물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진열칸에 놓여 있는 것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너무나, 뭐랄까, 너무나, 단 하루만 돌아가게 허락받은 과거로 돌아온 듯한

, 유쾌함과 애틋함, 그 사이에서 가슴이 찡하며 웃음이 터져 나오는. 면바지에 잠바, 반팔티셔츠만

걸쳐 입은 동네청년은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누가 80년 언젠가의 밤 아니랄까봐 아저

씨는 거의 만육칠천원이 나온 총계산에서 만원 아래 잔계산을 슥 빼어 버리셨습니다. 만원 달랑 한

장. 아저씨, 또 올게요! 라고 돌아서는 등에 아저씨는 뭐 조립하고 싶은 거 있으면 또 깎아줄테니

마음 편하게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전, 창문을 열어 밖을 바라 보았을 때 한무리의 골덴바지 소년소녀들이 문학의 밤을 끝내고

교회를 나서는 모습을 보아도 저는 오늘 밤 웃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의 80년대에 연서(戀書)를 보내며, 누가 오늘밤 편지를 받으면 가장 기뻐할까 하고 추억하다가 생

각이 나서 보내봅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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