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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7월 11일

늦은 아침을 만족스럽게 먹고 신문을 뒤적이다가 잠자리에 든다. 참된 한국전력 가족은 에어컨이 있

어도 쓰지 않는다. 침대 위에 대나무자리를 깔고 누워도, 과다한 체중의 몸뚱이에서 나온 땀은 절로

흘러내린다.


여섯 시를 알리는 곰살맞은 휴대폰 소리에 잠을 깬다. 아침에서 남은 반찬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학교

에 가기 위해 옷을 입는다. 엄마는 새벽에 먹으라고 김밥을 싸 놓았다. 동주부터 지금까지, 공부하는

족속들이란 언제나 죄많은 것들이다. 두어 시간은 있어야 비가 올 쯤이라면 날씨는 청명하지는 않아

도 대체로 시원하다. MP3에 새로 쟁여 넣은 노래들이 잔뜩이라 걷는지 춤을 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부평의 석양과 인천의 하늘에 새삼스레 감탄한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시간은 지난다. 저녁 무렵에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오랜만이어서일까. 잠이 덜 깬 탓일까. 퇴근시간임에도 버스가 속도감 있게 뻥

뻥 달리고 있어서일까. 구름이 드문드문 섞인 뻔한 저녁노을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지만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다.


혼잡한 교통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합정쯤 들어서부터로, 한강 위를 지나고 있는 버스 안은 들어가

기 전이나 벗어난 뒤이므로 항상 유쾌하다. 직접 가 본 외국의 강이라고는 갠지스가 유일하지만,

어딜 가 봐도 이만한 너비의 강이 이렇게 큰 대도심에 있기란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른쪽

창 밖은 밤, 왼쪽 창 밖은 아직 저녁이다.


여덟 시의 등교길과 열 시의 등교길의 풍경 및 난이도가 다르듯, 저녁의 등교와 밤의 등교도 그 양

상이 사뭇 다르다. 대여섯 시라면 문 열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주점들을 지나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려가는 학생들을 부단히 뚫고 백양로를 잰 걸음으로 지나가야 하는 형편이 대부분이다. 아홉 시쯤

이 되어서야 삼화고속에서 내리면 고기를 굽는 김을 헤치며 불콰해진 얼굴들을 몇 차례고 마주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보통은 종종걸음을 치며 낮보다 훨씬 재미있어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

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놀이이지만, 비가 오는 날이라면 혼자서라도 목로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을 막기 어렵다.

백양로에는 이미 학생들이 적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삼거리의 끝까지 노래를

부르며 갈 수도 있다. 수백 명의 사람을 지나면 당장의 앞걸음을 걱정하기도 바쁘지만, 가끔 한 사람

을 지나면 생김새나 걸음새를 지켜보는 재미가 생긴다.


연구실에 이르러 양말을 벗고, 바지를 갈아입고, 오르막을 걷느라 흐른 땀을 씻는다. 자리가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 갈아입을 바지를 들고 화장실까지 다녀오기가 귀찮아 몰래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다

가 먼 자리의 여학생과 눈이 마주친 오월의 어느 날 뒤로, 나는 더 이상 연구실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화장실에 간 김에 냄새가 고약한 친환경비누로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찻잔도 닦는다.

(비누로 이빨도 닦고 찻잔도 닦는다고 읽혀서는 곤란해진다.)


펴놓은 채로 그대로 집에 갔던 책을 들어 턱하고 접은 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궁금한 바를 꾹 찍

어 설명해 주는 선학은 아직 만나지 못 한 스승과 같다.

눈 앞에 살랑거리는 앞머리가 거슬려, 지방의 모텔에서 들고 온 싸구려 머리끈으로 앞머리와 윗머리

만을 질끈 묶는다. 옆머리는 아직 묶일 길이가 아니다. 꼴은 마치 왜구와 같아 우습지만 자리에는

거울이 없고 직업의 본분에 충실한 소행이라 나는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한다.

(괜한 첨언이지만 지방의 모텔에는 학회 때문에 갔다.)


열두 시가 넘으면 외솔관의 문도 닫히고 학교에는 아무도 없다. 새벽까지 연구실에 남은 두어 명의

학생들은 어학전공이라 서로 면식이 없는데,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그것이 더 편안하다.


책을 읽다가 잠시 고개를 들 때마다 차를 두세 모금씩 마시는 터라 한 시간에 한 번은 반드시 화장

실에 가는데, 오고가는 길에 매번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하는 것이 번거롭다. 어차피 학교에는 어학

학생들과 나뿐이므로 연구실의 문까지만 머리를 가리고 가면 된다.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복

도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한 학생과 멀찌감치서 마주쳤다. 불행히도 외솔관의 복도는 일자형.

난 원래 공부할 때 이러는 사람이오라는 얼굴로 뻔뻔하게 지나쳐 간 뒤 거울을 보니 머리끈 색은 하

필 연두색이다. 분홍색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여도 달궈진 얼굴은 식을 줄 모른다.


새벽 두 시를 넘겨 꼬르륵 소리를 무시하기가 어렵게 되어, 연구실 옆 복도에 앉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집에서 싸 간 김밥을 풀어놓는다. 멍하니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데 갑작스런 바람소리와

함께 일 분짜리 여우비가 다녀간다. 그 때를 위해 학교에 왔나보다, 하고 웃는다.


천금에 값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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