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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5월 24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있었다. 연계전공인 디지털예술학의 한 수업으로, 상업

영화 한 편을 기획하는 것이 주 내용인 영상문화기획이라는 수업이다. (그 수업의 필드가 디지털예술

학이라는 것이지 내 연계전공이 디지털예술학이라는 것이 아니다. 승인은 못 받았지만 아무튼 내 마

음 속의 연계전공은 언제나 일본학.) 학교에 7년쯤 몸 담으면서 볼 수업 못 볼 수업 다 겪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세상에는 아직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수업. 아버지의 직장이 공기업인지라 등록금을 따박따박 국고에서 헐어다 먹었기에 이날 이때

껏 아무리 심한 수업을 들어도 등록금이 아깝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수업은 그 생각을

180분동안 하게 해 준다. (그렇다. 꼴에 세시간 연강인 것이다! 그것도 주4파인 내 시간표의 목요일

맨 마지막 세시간. 네시부터 일곱시까지. 가지가지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수업에 도무지 커리큘럼

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쉬는 시간 한 번 없이 세시간동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총 프로듀서였던

강사의 자기자랑과 태극기 휘날리며가 얼마나 기념비적인 영화인가 등의 가열찬 찬사, 그리고 문화

는 창의력이다와 같은 동네 구청 문화강좌 수준의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러니 기분이 오죽했겠는가. 숙제나 조모임용 리서치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오는 김에 집에서

조용히 차 끓여 마셔 가며 하루를 알차게 채우려던 차에 그 수업을 들으러 신촌까지 비바람에 젖

은 바지를 처덕처덕 끌고 가자니.


학생들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수업의 내용이란 없고 결국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대용으로 시놉시

스와 짧은 시나리오, 그리고 기획서를 제출함으로써 그레이드가 매겨지는, 전형적인 조모임 위주의

수업이다. 그런데, 우리 조 사람들이 아무도 안 왔다. 교실 내에서는 조별로 앉아야 하는데 나는 마

치 망망대해의 무인도와 같이 육인용 책상 구석에 혼자 앉아 오늘도 계속되는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

를 들었다. 안 온 조원들을 원망하기보다는 부러운 마음이 더 했다.


다음주 수업은 종합 프리젠테이션이라 실제로는 오늘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

그나마 이젠 끝이라는 생각에 학생들이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에 (수업에 대한 불만과 좌절은 이미

모든 학생들의 공통인식이다.), 강사는 마지막 시간이고 하니 세시간 아니라 다섯시간 여섯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현장감각을 동원해 모두 컨설팅을 해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탈진과 절망은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표정에서 쉬이 찾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간의 모든 것들을 다 합하여

도 그 순간만큼은 안 되었으리라. 그나마, 다른 조의 사람들은 그 지옥같은 컨설팅의 시간을 (그녀의

컨설팅의 끝은 언제나 '왜 자네들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영화를 구상

하지 못하는가'이므로) 조원들과 함께 견뎌나갈 수 있겠지만, 나는. 나는 절망하는 자들 가운데에

서도 더욱 절망하는 자라, 학생들의 동정과 조롱이 섞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조별 컨설팅

을 시작하려던 강사는 내 쪽을 쳐다 보더니, 그 조는 학생들이 열의도 없는데, 내가 컨설팅까지 해

줘야 할 필요가 있나요? 라고 명백히 도발이 목적인 태도로 말했다. 나는 입술을 한일자로 꼭 다물

고 눈을 내리깐뒤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을 지은 채로 주섬주섬 짐을 싼 뒤 머뭇거리며 교실을 나서

서는 와하하 와하하 소리를 지르며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교정을 뛰어갔다. 흠뻑 젖은 녹색들은 아름

다웠고 휴대폰은 부럽다는 문자들이 날아들어오는 소리로 띵동띵동 배경음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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