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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記/2015 교토

3일차 - 젖어봅시다 나오시마

 

 

 

 

지난해 11월에 교토를 찾았을 때에는 겨울이라 그랬는지 3주 가량 체류하면서도 비 걱정이 없었다. 이번의 여행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날씨부터 체크하는 것이 습관 됐다.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여행 3일차의 아침.

 

 

 

 

 

 

 

 

이층 침대에서 내려다보니 폭우 소리가 들리고 창문은 온통 어둑어둑하다.

 

 

 

 

 

 

 

 

뱀부 빌리지에는 조식이 제공된다. 빵과 커피는 무한정으로 먹을 수 있지만 냉장 보관이 필요한 잼과 물은 양심껏 먹어야 한다. 주인이 상주하지 않고 별채에 머물면서 이따금 드나들기 때문인 것 같다. 나오시마에 관한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팁은 식당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잼 못 먹어 죽은 귀신처럼 잼 반 빵 반 해서 몇 번씩 구워 먹었다. 

 

 

 

 

 

 

 

세토 내해를 바라보는 긴 해안가에 돌로 만들어진 도리이가 서 있었다. 설핏 보았을 때에는 쓸쓸해 보였지만 찬찬히 다시 바라보니 어쩐지 엄숙한 기분이 들었다.

 

 

 

 

 

 

 

 

도리이 위로는 미니 사이즈 천불탑이.

 

 

 

 

 

 

 

 

도리이 옆에는 마찬가지로 바다를 바라보는 보살상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얽힌 내력을 밝히는 표지판도 없다. 그것이 도리어 마음에 사무쳐 한참 쳐다봤다.

 

 

 

 

 

 

 

 

날씨는 이미 폭우. 이 정도 되면 신발이 젖을까 걱정을 차라리 안 하게 되어 속 편하다. 말릴 걱정은 나중 일이고 될대로 되라지 하면서 분홍 우산 흩날리며 얍얍 걸어간다. 

 

이날의 루트는 베네세하우스 뮤지엄 - 이우환 미술관 - 지추 미술관이었다. 세 미술관이 한 길로 연결되어 있고 또 그 길 곳곳에 소소하게 볼 것들이 있다 하여 걸어가기로 했다. 해발고도로 보면 베네세하우스 뮤지엄이 제일 낮고 지추 미술관이 제일 높아서 일종의 등산 산책로가 되는 셈이다. 걸어올라가는 것이 부담되는 분이라면 셔틀버스 등을 이용해 지추 미술관에서 출발해 내려와도 된다. 

 

 

 

 

 

 

 

 

베네세하우스 뮤지엄 가는 길. 첫 날 빨간 호박을 보고서는 이제 더 놀랄 것이 있겠나 싶었는데 해변가 방파제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노란 호박. 정말 파도에 떠내려온 것 같은 모양새로 얹혀져 있었다.

 

 

 

 

 

 

 

 

적당한 수준의 인공미였다면 이렇게 안 어울리는 걸 왜 여기에 두었을까 싶을텐데 지나치게 인공적인 모양이어서 도리어 재미있었다.   

 

 

 

 

 

 

 

 

관리인도 없고 쿠사마 야요이의 약력 소개도 없다. 그냥 호박이다. 마음대로 즐기면 된다. 팬티가 이미 젖었더라면 아무 고민 없이 기어올라가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팬티가 아직 반건 상태였던 것은 그때엔 다행이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차라리 사진을 찍는 것이 좋았을 걸 아깝다, 하는 생각이 든다. 

 

 

 

 

 

 

 

 

베네세 하우스 앞의 조각상에서. 베네세 하우스는 앞서의 글에서 소개한 베네세 그룹이 세운 호텔이다. 나오시마에서는 가장 비싸고 좋은 숙박 시설이기도 하다. 베네세 하우스 자체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하여 높이 평가받는 디자인의 건물들이다.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은 이 호텔과 연결되어 있는데, 베네세 하우스에 묵지 않는 사람들도 별도의 입장료를 내면 들어갈 수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이미 연습한 바 있었던 같이 읽기 연기. 폭우 중에도 손쉽게 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인민의 벗.

 

옷이 흠뻑 젖기도 했고 배터리가 걱정되기도 했고 해서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과 그 다음의 이우환 미술관에서는 사진을 거의 찍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강하게 풍기는 현대미술의 향기에 내가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한 탓도 좀 있다.

 

 

 

 

 

 

 

 

 

정말 좋았던 것은 마지막에 있는 지추 미술관이었다. 산 정상에 파묻힌 형태의 지추 미술관은 앞서 소개한 것처럼 '자연과 빛'이라는 주제 하에 건설되었고 전시되는 작품 또한 같은 주제로 활동한 미술가 세 명의 걸작만 선택하였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그리고 클로드 모네이다.

 

지추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연못과 수련이 있었다. 폭우에 체온을 잔뜩 빼앗긴 나는 이 광경을 보고도 참 예쁜 연못인데 물이 더럽다고 생각했을 뿐 곧 보게 될 모네의 수련 그림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추 미술관에는 모네의 수련 진품이 있다. 교과서 구석에서나 손바닥만하게 모네의 그림을 보았던 나는 수련이 이렇게 큰 그림인지 몰랐다. 여기에 있는 수련 그림은 가로 2m, 세로 6m라고 한다. 천장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그림을 비추는데, 비오는 날이라 어둑어둑해서 연못의 먹먹한 느낌에 수련의 청초함이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잠시라도 해가 비추면 또 다르게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침 나절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점심이 넘도록 걸어댕긴 것이라 춥고 배가 고팠다. 지추 미술관에 작게 마련되어 있는 카페를 찾았는데 딱히 끌리는 음식도 없고 값도 비싸서 토마토 수프 한 그릇과 '올리브 사이다'를 사 먹었다.

 

 

 

 

 

 

나오시마 인근에는 쇼도시마라는 섬이 있는데 이곳은 거대한 올리브 농장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파는 것일까. 맛은 덜 달고 덜 쏘는 사이다 맛이었다. 사이다라는 이름을 모르고 컵에 담아 마셨다면 사이다의 일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숙소 인근으로 돌아오는 길. 사진의 벽에 있는 것은 흰 철사로 만들어 놓은 캐릭터 모양이다. 고즈넉한 동네 자체로도 매력이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이런 것을 숨겨 놓으니 소소한 재미를 놓칠 틈이 없다.

 

 

 

 

 

 

 

 

아주 늦은 점심을 사 먹으면서 아침 나절 보았던 불상을 그렸다. 한 바퀴 더 둘러볼까 하다가, 내일은 날씨가 갠다는데 신발이 말라야 더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일찍 들어가 쉬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