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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記/2015 교토

2일차 - 1. 오사카 성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앞의 덮밥 체인점에서 조식을 먹었다. 만화책이나 신문을 들여다 보며 젓가락으로 밥을 후룩후룩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반 년 만에 다시 일본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부른 배를 두드려가며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구경을 가보니 귀여운 크기의 야채즙이 있어 한 팩을 샀다. 두 손가락으로 들고 있는 것도 한 입에 확 털어넣는 것도 무척 재미가 있었다. 참, 즐겁게 돈 쓰게 만드는 건 얘네들이 확실히 잘 한단 말이야, 따위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짐을 쌌다.

 

 

 

 

 

 

 

 

인도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델리는 입국과 출국만 했을 뿐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처럼, 지난 번의 교토 여행에서도 오사카에는 몇 시간도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여행을 떠나는 마음부터가 훨씬 여유로왔고 또 오사카를 떠나 교토로 바로 갈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두 군데 정도는 들러보기로 했다.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의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 주변에 갈 만한 데가 없나 둘러보니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오사카 성이었다. 그 정도라면 직접 보아둘 가치가 있지 않겠나 싶어 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숙소에서는 지하철로 대여섯 정거장 정도였다.

 

 

 

 

 

 

 

 

내게는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장편소설 <대망大望>을 광적으로 읽어대었던 시기가 있다. 일본어라고는 문장 몇 개 정도만 주워섬길 정도이지만 일본인의 이름은 비교적 쉽게 읽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대망>은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고 각지의 토호들이 발호하는 일이 있었다. 계속되는 난세의 한가운데에 첫번째로 '전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것은 오와리 출신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부하의 배신에 의해 불의의 죽음을 당한 뒤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농민 신분에서 노부나가의 부하까지 올라갔던 기노시타 도키치로郞,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히데요시 체제의 2인자로 끊임없이 견제를 받다가 히데요시 사후 그의 유자를 몰아내고 에도 막부를 세워 '전국 통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다.

 

<대망>은 이 세 사람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서로 죽고 죽이는 전국 시대에 태어난 인간들의 슬픈 삶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큰 주인공은 이에야스라는 전제 하에 소챕터 별로는 각각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 시각에서의 이야기들을 다루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스무 권을 다 읽고 나면 독자는 이에야스 뿐 아니라 수십 수백의 인물들에게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 애정을 갖게도 된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것이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라갔던 만큼 그 지혜나 성실성 등은 우러러보게 되는 면이 적지 않으며, 소설에서뿐 아니라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는 무척 소탈하고 또 개구진 면이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을 겪은 피해자의 후손 입장에서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애정이 가는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만화, 영화와 같은 현대의 컨텐츠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는 포악성이나 카리스마가 강조되는 반면 히데요시는 장난스러움, 유쾌함 등의 캐릭터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오사카성은 그 히데요시가 권력의 절정기를 온전하게 보낸 곳이다. 특히 유명한 것은 위 사진에 나와있는 천수각閣으로, 히데요시는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처마 끝에 황금비늘을 붙인 잉어를 올려 위세를 뽐내었다 한다. 천수각은 그 후 히데요시의 아들과 도쿠가와 군이 벌인 전투 끝에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고, 최종적으로는 1931년에 중건되어 최초의 모습과는 모양과 크기 모두 꽤 달라졌다 하지만 한반도의 거주민으로서 그 터를 걷는다는 것은 복잡한 생각을 들게 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관광을 왔고 건물이 예쁘니까 사진은 찍지만 저 자리에서 두 차례 왜란을 지휘했다고 생각하면 역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든다.

 

 

 

 

  

 

 

 

올해인 2015년은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로부터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승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 군대는 괴멸하고 마침내 도쿠가와의 시대가 시작된다. 오사카 성 곳곳에는 <오사카의 진陣 400주년 기념 특별전, 도요토미와 히데요리>라는 전시회 깃발이 걸려 있었다. 

 

 

 

   

 

 

 

 

현재의 천수각은 외곽만 옛 건물일 뿐 그 안은 엘리베이터와 전시물, 기념품 가게 등이 가득한 일종의 박물관이다. <대망>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의 초상화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우직한 성격으로 주군을 보필했으며 노년에는 도요토미 가와 도쿠가와 가의 화목을 위해 몸바친 일종의 평화주의자라 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임진왜란에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한 무장이기도 하다.

 

 

 

 

 

 

 

 

400주년 기념 스태프가 있길래 한 장.

 

 

 

 

 

 

 

 

전시회 한 쪽에는 당시 무장들이 썼던 투구를 재현해 놓았다.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들은 깃발의 가문 문양 뿐 아니라 투구와 갑옷에 있어서까지 개성을 추구한 바 있었다. 왼쪽부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투구 모양이다. 몇백 엔인가를 내면 이 투구를 쓰고 옆에 설치된 전국 시대 배경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나는 관광지에 가서 이런 얼빠진 체험이라면 빠지는 법이 없지만 이 날만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투구의 사진만 찍고 말았다. 소설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주군의 명령에 충직하게 봉사하는 심복이자 2대째의 주군까지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충신이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을 가장 많이 학살한 장수이며 야사에 따르면 늙어서 임신이 잘 되지 않는 히데요시에게 정력에 좋다는 호랑이 고환을 보내려고 조선의 호랑이들을 거의 몰살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국의 선은 어디까지로 그으면 좋을까. 나는 이 여행이 끝나갈 무렵 지난 여행 때부터 사고 싶어했던 남성용 기모노를 결국 한 벌 사기도 했고, 위의 저 무장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액션 게임을 구입해 신나게 즐긴 적도 있다. 그래 놓고 전국 무장들의 투구는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이것은 위선인가 아닌가.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야망을 위해 침략 전쟁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쳐죽일 놈이긴 하지만, 그렇게만 딱 전제해 두고 나는 전국 시대의 일본 문화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혹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인가 패륜적인 것인가.

 

 

 

 

 

 

 

 

남긴음료는 안 마셔.

 

 

 

 

 

 

 

 

 

햇살을 쬐면서 잡상을 잇고 있는데 유치원 병아리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제 때에 결혼을 했으면 딱 저만한 자식이 있겠구나 싶어 눈웃음을 지으며 보다가, 문득 고쳐 보니 아이들의 모자 모양이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군모 모양과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해도 좋은 것일까, 생각이 너무 많이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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