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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0

태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잘 때 몸에 무언가 걸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놓고도 쓰지 않던 수면 안대를, 호기심 삼아 착용하게 된
 
뒤로 이사온 뒤 원치 않게 일반인 스케쥴에 맞춰졌던 수면 시간이 다시 아침해와 함께 잠드는 것으로 돌아갔다. 커텐

을 치지 않고 자더라도 걱정 없다. 눈을 뜰 때까지 천지는 무사 깜깜이다.


덕분에 꿈을 꾸는 일이 다시 많아졌다. 아마도 비정상적인 시간에 수면을 취하는 탓에 얕은 잠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던 며칠 전이다. 아주 즐거운 꿈을 꾸어서 웃으며 일어났는데 잠시 물을 마시는 사이에 까먹어버렸다. 꼭 기억을

해 내고 싶었기에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를 굴려 봐도 영 떠오르질 않았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며 나도 모르게 노

래를 흥얼거렸는데, 뜬금없는 동요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색종이를 곱게 접어서 물감으로 어떻게 색칠하고 뭐 그런

노래였는데, 들을 일도 부를 일도 없는 노래가 왜 새어 나왔지 좀 부끄럽다 생각을 하다가, 꿈에서 소풍을 가며 그 노

래를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쓰리세븐 가방을 메고 랜드로바 신발을 신고서는 좀 추운 봄바람을 맞으면서 줄 맞춰 걸

어가던, 그 마음 때문에 웃으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서른이 되며 내게 일어난 몇가지 변화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역시 만사에 무심해졌다는 것이다. 인생살기는 

편해졌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일삼는 천성이라 흰머리도 동년배들보다 배는 많은데 잘됐다 여겼다. 작살내지 않으

면 성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미운 놈들도 안 보면 그만이지 생각하니 그럭저럭 용납할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쩐지 내가 안달복달하면서 챙기던 때보다 좋아진 듯 했다.


와중에 마음 속엔 답답하게 쌓인 것이 있었다. 뭘까 싶다가도 귀찮아서 내버려 두다가 생각을 해 봤다. 항상 기대하고

과하게 준비하고 이런저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나는 일이든 사람이든 남들보다 더 세세히 살피는 일이 많았다. 그 살

핌 자체도 좋았지만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내고 또 스스로 글로 적으며 신나하는 일이 많았었는데, 무심해진 뒤로

는 뭘 살필 필요가 없었다. 관심이 적어지니, 설렘이 적어졌다. 앗차 그거였구나, 제기랄.


마음에도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하고 있다가 태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한참 귀여웠을 때부터 함께 자라왔던 미랑이어

서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거나 태율이의 사진을 sms로 받거나 할 때엔 영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았는가 말고, 어떻게 '엄마'가 되었는가를 자세히 듣고 나니 신기하고 기쁘고 재미가 있었다. 말하자면, 내가 살피고

기뻐했을 무언가를 미랑이 대신 말로 전해준 것이다. 끊고 보니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을 설레다니, 전성기 때도 없던

일이다. 역시, 마성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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