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일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분노의 숫자> (동녘. 2014, 4.)

 

 

 

 

구성을 소개하는 데 있어 강준만의 저작보다 수월한 책을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민간 싱크탱크 중 하나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2014년 신작. 부제는 '국가가 숨기는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

 

제목과 부제 그대로, 한 명의 한국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접하게 되는 숫자 가운데 분노할 만한 것들, 그런데 국가에서는 숨기고 말해주지 않는 것들을 보고서 형식으로 일람하였다.

 

본문은 1장 '세 살 불평등 언제까지?'에서부터 11장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노후'까지 총 1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영유년기, 청소년기, 중장년기, 노후와 같이 개인의 생애 사이클에 맞춰 분석을 시도한 장도 있고, 가계 부채, 부동산 가격, 양극화 등 사회 구조적인 이슈를 다룬 장도 있다.

 

하나의 장은 20-3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갖고, 그 안에서 다시 4개에서 6개 정도의 꼭지로 나뉜다. 그러니까 한 꼭지는 3-6페이지 가량이 되는 셈이다.

 

한 편의 꼭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 페이지에는 '최저 출산율의 사회', '아동가족복지, OECD 최하위'와 같이 전체의 내용을 잘 함축시킨 소제목이 제시되고, 두번째 페이지에는 관련 수치들을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인포그래픽이 실려 있다. 특히 이 인포그래픽은 직관적으로 잘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유의미한 정보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서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드높이는 특장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세번째 페이지부터는 2-4페이지 정도에 걸쳐 인포그래픽으로는 제시하기 어려운 관련 정보나 독자가 생각할 만한 점 등을 설명한다.

 

의도가 명확하고 구성이 체계적인데다 글까지 쉽게 써 주어서 책은 술술 읽힌다. 독서를 멈추게 된다면 이 책을 통해 고발되는 내 나라의 비참함 때문에, 그리고 그 비참함이 유난스런 감수성을 지닌 한 필자의 주관적 감성 등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객관적 수치를 통한 분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일 것이다.

 

종종 일기에 쓰는 것처럼 나는 요새의 평일에는 한 고등학교의 방과후 수업에 출강하고 있다. 며칠 전 수업 시작을 앞두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한 학생이 주위를 뱅뱅 돌더니 말을 붙여왔다.

 

 

- 선생님. 선생님 애들 사이에서 별명 있어요. 알고 계세요?

 

 

별명의 역사에는 그리 즐거운 기억이 없었던 터라 크게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생한테 관심 있다고 말 붙이는 학생에게 면박을 주고 싶지 않아, 그래 애들이 뭐래니, 하고 묻자 그 학생은 '염세주의자요'라고 답했다. 시키는 공부만 하고 살면 안된다는 취지로, 청소년 불행지수 OECD 1위, 이혼율 OECD 1위, 40대와 50대 자살률 세계 1위, 노령층 빈곤율 압도적인 차이로 OECD 1위 따위의 수치를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됐던 모양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것이 주관적 인상이 아니라 객관적 수치로 증명되는 것일진대, 현실을 적시하는 것을 '염세주의'로 볼 정도로 지금 한국사회를 모르는 애들이라면, 얘들이 나중에 사회를 접하게 되면 정말 염세주의자 되기 딱 좋겠구나.

 

한국사회를 다루는 수치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받았을 인상이지만, 이 '분노의 숫자'들은, 다른 나라의 일이라면 마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고작 한 나라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수치들이 몰릴 수가 있는 건가? 알고 계셨던 분들이라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정보들을 한 권에 잘 모아놓은 사료적 가치가 있어서라도, 몰랐던 분들이라면 갑작스레 알게 되었을 때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장 한 권을 구입하고, 중고서점에 매물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사 모을 예정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꼭지의 소제목이 해당 내용을 잘 함축하고 있어서, 출판사 제공의 목차를 댓글의 형식으로 붙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