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2013.10.21 20:57

 

 

 

 

 

1.

 

길지 않은 서양 철학사의 독서에서, 나는 이렇게나 상냥한 책을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책의 상냥함은 조지아대학교의 사학과 교수인 커크 윌리스의 2009년 판 서문에서부터 전투적으로 육박해 온

 

다. 양 철학사 개론서 몇 권의 끄트머리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이름 정도나 몇 차례 접해본 것이 전부인 나에게

 

는, 건조하고 딱딱한 논문 식의 문체, 혹은 그 감동의 깊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찬사의 문체로나마 연대기나 활

 

동, 사상 중 하나 만이라도 설명해 주는 서문이 있다면 감읍하며 받아들여야 할 첫 디딤돌이 되어 줄 것이다. 그

 

런데 15페이지의 짧은 분량에서, 커크 윌리스는 자연인 버트런드 러셀의 연표, 사회인 버트런드 러셀의 종횡무

 

진하는 이력, 그리고 지성인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사상과 그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연표와 사회적 이력을 구성하면서 그가 맺은 인적 관계망과 사회의 평판 등을 기준으

 

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직 총리의 손자이자 백작 작위 계승권자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는 철학과 논리학 등의

 

문으로 초기의 성공을 이루어냈으며 제자로 T.S. 엘리엇,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을 두었다는 것 등은, 간단

 

하기는 하지만 그가 갖는 스펙트럼의 범위가 아주 넓을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충분한 정보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인 영국의 참전에 반대하였으며 그로 인해 한편으로부터는 배신자로 경멸을 받고 한편으로부

 

터는 지성으로 추앙을 받았다든지, 2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조국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았으며 노벨 문학상을

 

상하였다든지 하는 사실로는, 개개의 말단까지는 짐작할 수 없으나 그의 사상들에 공유된 기본적 세계관의 냄

 

새 정도는 맡을 수 있게 해 준다.

 

 

아울러 커크 윌리스는 결어부에 이르러, 길이도 제각각이며 각기 상당한 시차를 두고 쓰여진 글의 모음인 이 책

 

은, 단순한 선집으로서 아니라 그가 일생을 추구하였던 '진보에 대한 확신', '지성을 추구할 자유', '민주주의 정

 

치' 등의 가치를 반복적으로 재확인할 수 있는 계기라고 그 가치를 평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전문적 직업인으

 

로서의 철학자들이 버트런드 러셀의 지엽까지 낱낱이 장악하고자 읽는 전공 서적이 아니라 오히려 버트런드 러

 

셀의 초입자들이 택할 수 있는 진입로 가운데 가장 넓고 확실한 길이라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잘 모르는 판

 

에 커크 윌리스가 누군지는 더더욱이 깜깜이지만, 그래도 어딘가의 누군가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때에는 일말

 

의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일단이지만 그래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2.

 

그리고 시작되는 버트런드 러셀의 상냥함의 메인 디쉬. 책의 본문은 총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양 철학사

 

에 대해 초보적 지식이라도 구비하고 있어야 조금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1장 '이 모든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

 

가?'정도를 제하고 나면 나머지는 언제의 누구라도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명제들을 다루고 있다. 왜 철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철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2장 '초보자를 위한 철학'이나 교사에게 요구되는 본

 

질적 자질과 그것을 저해하는 요소 등에 대해 탐구하는 8장 '위대한 스승이 되려면' 등이 좋은 예이다. 그 외의

 

장에서도 평화, 신앙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혹은 생각해 보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재가 '난무'하며 출연한다. 심지어, 9장과 10장의 제목은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과 '인류에 해

 

끼친 관념들'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말대로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명하는데부터 시작하면 된다.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생각의 출발점과 방향을 이토록 상냥하게 잡아 주다니.

 

 

 

3.

 

여기에 더욱 독서의 맛을 돕는 것은 저자의 유머이다. '여는 글'을 부분 인용해 본다.

 

 

지난 15년 동안 이런저런 상황에서 쓴 다음의 에세이들은 대부분 투쟁의 기록으로서, 그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장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간혹 경망스러워 보이는 글이 있을지언정 원래의 목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했다. 경망스럽게 쓴 까닭은 엄숙하고 오만한 자들을 상대로 더욱 엄숙하고 오만하게 싸워봤자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p23)

 

 

'엄숙함'과 '더욱 엄숙함'은 피아구분이 어려우므로 그 대칭항인 '경박함'을 택했다는 이 언술은 그 논리 상의 전

 

복 때문에 무의식적인 웃음을 유도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교조주의의 본질과 '적'을 상대하는 전략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유머는 단순한 언어적 습관이 아니라 투쟁과 논

 

설에 기반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는 본문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

 

다.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비합리', '전쟁', '교조주의'와 같이 당대에는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던 관념을 상대로 한 투쟁의 기록이다. 저자로서는 이에 맞서기 위해 사력을 다 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일반 독

 

자들이 그 문제의식과 열정의 크기를 모두 공유하는 것은 무리이다. 일단 중요한 것은 '함께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 때 '적'의 본질을 적시하고 그에 대한 비유, 조롱을 통해 이해를 심화시키는 '유머'는 큰 힘을 발휘하

 

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 전략이 가장 빛을 발하고 있는 부분은 349쪽부터 5쪽에 걸쳐 실려 있는 '스스로 쓴 부

 

고'인데, 분량이 길지 않으니 이 부분은 직접 읽어 보시길 권한다.

 

 

 

3.

 

메인 디쉬가 소문난 집에 후식까지 이름이 나는 것은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번역서의 마지막에는 체로 옮긴

 

이의 글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독자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내용은 번역을 맡게 되는 과정의 신이함, 번역

 

을 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최초의 독자인 번역자의 독후감과 가족에 대한 감사 등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

 

이기는 어려운 글이지만 다른 언어로 쓰여진 책을 한국어로 접하게 해 준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옮긴이의 글'에서까지 유감 없는 상냥함을 떨치고 있다. 번역자인 장성주는 이 책

 

의 의의에 대해 '길게 얘기하려' 했으나 커크 윌리스에게 '선수를 빼앗겼'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책에서 언급된

 

버트런드 러셀의 어떠한 '문적 주장'이 그 후 어떠한 경과를 가졌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을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러셀이 직접 집필한 본문의 어떠한 내용에 비해 봐도 결코 그 중요성이 뒤지지 않는 정

 

보이다. 그 저자에 그 역자,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부분이다.

 

 

 

4.

 

한 차례의 독서 만으로 그 내용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무척이나 즐

 

거웠고 또 버트런드 러셀의 다른 책들과 이 책이 속한 시리즈인 '철학자의 휴일' 시리즈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을 하게 됐다. 그 탓인지, 책을 덮고 표지를 다시 보니 처음 볼 때에는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던 표지 그림이

 

잘 데워진 정종이 담긴 술잔 같아 보인다. 추운 겨울이라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도 받아들고 싶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입문 뿐 아니라 철학의 입문을 바라는 사람에게 건네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0.

수상한 시절이라 겁이 나지만, '미국'의 대척점으로 호칭된 '소련'의 현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지금 여기'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겹쳐 보였다. 아전인수 격의 망상인지 옛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인지, 책을 읽은 다

 

른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osted by 최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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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제공 받고 마감 지켜 내야 하는 리뷰는 무의식적으로 꼰대 같이 쓰게 되는 것 같다. 쓰고 싶은 대로 쓰자는 표어라도 써서 잘 보이는 데에 걸어 놓든지 해야겠다.

    2013.10.21 20: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