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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5

밤에

 

 

늦은 밤. 밤을 새워 해야 할 일이 생겨 대충 옷을 걸쳐입고 편의점으로 나섰다. 평소 물 외의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는 터라 이따금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면 효과가 굉장하다.

 

사내 혼자 사는 것이 안돼 보였는지 나는 심심치 않게 불특정 다수로부터 밑반찬을 공급받는데,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것은 멸치볶음이다. 장조림이 상할 것 같으면 술안주로 먹으면 되고 카레가 남아돌면 우동면을 넣어 먹거나 돈까스 위에 부어 먹으면 된다. 하다못해 산더미같이 쌓인 김치도 작심하고 몇 끼쯤 곰탕을 끓여먹으면 군둥내 나기 전에 처리할 수가 있는데 멸치볶음만은 멸치볶음에다 밥을 말아 먹어도 도무지 줄지를 않는다. 도와주신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서 나는 밤에 마실을 나갈 때엔 멸치볶음을 한줌씩 쥐고 나아가 골목길 언저리나 담벼락 밑 쯤에 휘휘 뿌리고 다닌다. 연희동은 주민 구성이 대부분 학생이라 그런지 낯이 익도록 오랫동안 보이는 길고양이들이 많다.

 

고수레 하는 농군처럼 세상에 멸치볶음을 뿌리다가 골목을 도는데 가로등 근처에 남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어 깜짝 놀랐다. 이크 소리를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가로등 바로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물을 할짝할짝 핥고 있었다. 주신 거예요? 라고 묻자 남자는 네, 라고 답했다. 나는 물그릇 옆으로 다가가서 남은 멸치볶음을 쏟고 남자가 서 있는만큼 물러났다. 길고양이는 잠시 경계를 하더니 멸치와 물을 번갈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고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에너지 드링크는 2+1으로 2200원이었다. 하나에 팔백 원에 팔 것이지 나쁜 놈들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세 개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잠깐 사이에 남자는 간 데 없었고 고양이만 남아 열심히 식사 중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자리 차고 앉아 밥을 먹는 고양이의 모습이 흡사 한 폭의 정물화 같아,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방에 돌아와 휴대폰을 들고 다시 나가니 그새 고양이도 사라져 버렸다. 닌자 마을이야 뭐야 생각하며 살펴보니 물과 멸치는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게걸스레 먹던 모습으로 보아 배가 찼을 리는 없고 아마도 사람의 통행이 많아 잠시 피했나보다 싶어 나도 발소리를 죽여가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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