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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記/2015 교토

6일차 - 2. 도지同寺, 구카이空海, 오헨로お遍路

 

 

 

 

도지東寺에 갔다. '동사東寺'라는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고수는 꾸미지 않는 법이다.

 

절이 지어진 것은 796년의 일으로 물경 천이백 년 전의 건축물이다. 당시에 헤이안쿄京라고 불리웠던 교토는 계획도시로서 바둑판 모양 모양으로 구획되었다. 지금도 교토의 거리에 산조三条, 시조四条, 고조五条 등의 숫자가 들어간 이름이 나란히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바둑판 모양의 정문, 즉 출입구가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하며 수많은 괴담의 무대가 되는 라쇼몽門이고 라쇼몽 양쪽에 배치된 것이 사이지西寺와 도지東寺이다. '서사西寺'는 이후 몰락하여 지금은 폐사터만 남아있지만 도지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다시 찾은 교토에서 첫번째 방문지로 도지를 고른 것은 봄맞이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토에는 이름난 마쓰리 뿐 아니라 유적지 개방이나 유물 전시 등도 시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꽤 많다.

 

 

 

 

 

 

 

 

지나가면서 유명한 오층탑을 슬쩍. 맛난 것은 맨 나중에 먹는 습성대로 오층탑은 나가는 길에 가기로.

 

 

 

 

 

 

 

 

비는 이미 거세어졌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옆에서 휘몰아치는 기세였기 때문에 우산은 이미 기분 좋은 색의 악세사리였을 뿐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도지에 들어가서 곳곳에 눈에 띄는 표지판은 봄맞이 특별 전시회가 아니라 '납경소納經所'라는 안내문이었다. 납경소라면 경經을 드리는納 곳所인데, 무슨 경을 누구에게 드린단 말이가. 의문을 해소하려면 '구카이空海'라는 스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구카이空海는 일본 불교계의 수퍼 스타이다. 진언종宗을 창시한 개조로서 천태종의 최징과 함께 양대 거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시호 또한 '불법을 널리 폈다'는 뜻에 '홍법대사師'이다.

 

 

 

774년 생으로 일찍부터 교토에서 불교 공부로 이름을 날렸으며 서른이 되던 해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었던 당나라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때 스승으로부터 밀교를 전수받고 돌아와 진언종을 창시하게 된다. 

 

불교의 교파에 대한 설명은 어렵다. 현교顯敎-밀교密敎의 명확한 구분부터가 쉽지 않은데 천태종, 진언종과 같이 종파의 이름까지 나오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간단히만 정리하면 이렇다.

 

진언종은 밀교다. 현교顯敎의 현은 드러나다 현, 이고 밀교의 밀은 은밀隱密하다, 할 때의 그 밀이다. 말 그대로 현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인간의 몸으로 드러나서 가르친 것을 따르며 밀교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불성佛性 그 자체를 추구한다.

 

외부인이 가장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차이는 교주와 경전이다. 현교에서는 석가모니, 즉 석가불을 신봉하고 밀교에서는 태양의 인격신인 대일여래來를 신봉한다. 현교의 경전은 석가모니불이 설법한 대승경전(大乘經典), 소승경전(小乘經典) 일체이고 밀교의 경전은 금강정경(金剛頂經), 대일경(大日經)이다.

 

밀교는 일종의 대중불교운동의 결과물이다. 어려운 불법을 외우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진언言을 외우고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수행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삼밀密, 즉 행동[身密], 말[口密], 생각[意密]이 부처와 같아지면 자기가 곧 부처가 된다는 사상이다. 이름을 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의 태반이었던 시대에 매력적인 사상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어려운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넘어가자. 아무튼 수퍼스타 구카이는 진언종의 창시자. 진언종은 밀교. 이렇게만 정리해둔다.

 

이 구카이가 이미 진언종의 조종이 되어 쉰이 넘어갈 무렵인 823년 사가嵯峨 천황의 명으로 주지로 부임한 곳이 바로 이 도지이다. 도지는 헤이안쿄에 도읍한지 얼마 안 되어 세워지긴 했지만 구카이가 올 때까지는 몇몇 건물만이 있는 절이었다고 한다. 구카이는 이 절에서 자신이 구축해 온 불법의 세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도지가 구카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곳곳에 있는 '납경소' 안내판과 이 지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풍운의 구카이는 42세 때 당시로서는 궁벽한 곳이었던 시코쿠四國를 찾아 직접 88개소의 절을 개창했다고 한다. 이 길의 이름이자 이 길을 따라가며 구카이의 뜻을 몸에 익히는 수행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이 오헨로(お遍路)이다. 총 1200km의 대장정이다.

 

오헨로가 언제부터 있었고 또 행해졌는지의 기록은 확실치 않다. 다만 헤이안 말기에 이미 시코쿠의 해변길을 걸으며 수행하던 수행승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해진다. 중세인 무로마치 시대에는 '88개소를 순례한다'는 컨셉이 이미 정착이 되어 있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보편적인 경험이 되었다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교통 수단의 발달과 함께 자동차, 버스를 이용한 오헨로가 보급되었는데, 90년대 이후로는 오히려 옛날과 같이 직접 도보를 통한 체험이 방송과 출판물을 통해 집중적으로 홍보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불법을 익히고자 하는 불자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오헨로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이 힘든 인생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 일종의 관광 명소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많지는 않지만 오헨로 서적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으며 블로그 등에서는 꽤 많은 체험담을 들을 수 있다.

 

물론 오헨로는 시코쿠四國의 88개소를 도는 것으로 혼슈本州의 교토에 있는 도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나 오헨로 자체가 구카이 때문에 생겨난 길이고 해서, 예로부터 오헨로를 시작하는 사람은 구카이가 주지로 있었던 도지에서 출발 인사를 하고 구카이가 죽어서 묻힌 고야산高野山의 안쪽 사원에서 순례 종료 표시를 해왔다 한다.

 

이 순례의 과정에서 매 88개소마다 하나의 지점에 도착하면 일종의 인증 도장을 찍어준다. 이것이 납경納經이다. 순례자들은 납경을 받을 수 있는 납경장納經帳을 갖고 다닌다. 이런 납경장을 팔기도 하고 납경을 해 주는 곳이 바로 납경소이다. 내가 자주 본 것이 바로 이 안내판이었던 셈이다.

 

 

 

 

 

 

 

 

납경소에 들어가면 이렇게 오헨로 용 의복을 판다. 안에 받쳐입게 되어 있는 티셔츠에는 구카이의 초상과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글자가 써져 있는데 이는 항상 구카이와 함께 다닌다는 뜻이라 한다. 티셔츠가 이천 엔이고 다른 걸칠 것들도 그 정도였으니 과히 비싸지는 않은 것 같다. 옆에서는 아직 인증도장이 찍히지 않은 새 납경장을 파는데 별다른 장식 없는 천 엔 짜리부터 하드커버 재질의 만 엔까지 다양한 상품이 있었다.

 

 

 

 

 

 

오헨로는 본디 수행의 일종이었기 때문에 의상에도 어느 정도의 규정이 있었다. 특히 가장 엄격한 규정은 겉옷이 흰 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헨로가 험난하기도 했고 산짐승도 있으며 꾸준히 식사를 하기 어렵기도 해서 실제로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입고 있던 겉옷을 바로 수의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갓을 관 삼아 몸을 덮어주고 지팡이로 묘비를 삼았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편의성에 맞추어 많이 간소화되어, 구카이를 상징하는 갓과 지팡이, 그리고 하얀 겉옷 정도만이 남았다. 그간은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지, 도지를 방문한 뒤로는 교토에서 이런 차림의 여행객들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석에서는 지팡이도 팔고 있었다. 티셔츠나 지팡이 하나 정도는 사 올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지팡이에는 별다른 규정이 없지만 단 하나, 구카이가 비 오는 날 다리 밑에서 비를 피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오헨로 도중 다리를 건너가면서는 지팡이로 다리를 짚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도 재미있는 설정이다.

 

 

 

 

 

 

 

 

홍법대사님의 '이번 달의 말씀'. 자유롭게 가져가 주세요. 떠듬떠듬 읽었다. 몇 장 갖고 올 걸.

 

 

 

 

 

 

 

 

교토의 절이나 신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부적을 파는데, 이곳저곳에서 다 팔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절과 신사의 특색을 살려 거기에서만 파는 상품들이 있어 재미가 있다. 도지에서는 당연히 홍법대사 구카이의 부적을 살 수 있다. 이 부적은,

 

 

 

 

 

 

 

 

 

'도중 안전' 부적이다. 운전하는 사람이나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효험이 있다고 한다. 스스로의 반응 신경을 믿지 않아 갖은 수를 다 써서 기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운전을 하게 될 자신을 위해서 샀다.

 

 

여기까지 '배워 봅시다' 코너를 잘 참아온 분을 위한 보너스. 한 번 더 배워봅시다. 오헨로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 설화가 있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구카이가 직접 하나하나 돌아다닌 길이라는 설이 있고, 구카이 사후 제자인 신제(眞濟)가 그의 유적을 돌아다니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고, 사가 천황의 자식으로 구카이의 제자였던 신뇨 친왕眞如親王의 행적이라는 설도 있다. 그 가운데 정작 오헨로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이야기이다.

 

 

에몬 사부로衛門三郞는 구카이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시코쿠 지방의 탐욕스러운 부자였다. 어느 날, 구카이가 더러운 승려의 모습으로 에몬 사부로의 문 앞에서 먹을 것을 청했다. 에몬 사부로는 막대기로 승려를 때리며 그를 내쫓았으나 승려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탁발을 왔다. 성난 에몬 사부로는 구카이의 밥그릇을 빼앗아 깨 버렸다. 사발은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고 구카이는 떠났다.

 

그 뒤 에몬 사부로의 여덟 아들이 차례차례 죽고 말았다. 그의 꿈 속에 구카이가 나타나 죄를 회개하도록 하였다. 에몬 사부로는 그간의 만행을 뉘우치고 가진 재산을 모두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아직 시코쿠 어딘가에서 수행 중일 구카이를 찾아 참회하기 위해 그의 뒤를 좇는 여행길에 떠난다. 

 

시코쿠를 스무 번 돌고 반대 방향으로 몇 번 더 돌다가 병을 얻어 쓰러진 에몬 사부로 앞에 구카이가 나타났다. 마지막 소원을 묻는 구카이에게 에몬 사부로는 그의 지인이자 영주의 일족인 고노河野 집안의 사내아이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숨을 거두기 전 대사는 그의 손에 작은 돌을 쥐어 주었는데, 일 년 후 고노 가문에서는 오른손을 꽉 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상하게 여긴 고노 가문에서 점을 쳤더니 '깨끗한 물로 씻으면 주먹을 펼 것이다'라고 하여, 서둘러 강에서 씻기자 쥔 손 안에는 작은 돌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 사건의 배경이 된 안요지安養寺는 이시테지石水寺로 이름을 바꾸었고 아이의 손을 씻었던 강은 이시테가와石水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돌은 현재 에히메 현 마츠야마의 51번 찰소 이시테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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