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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마영신, <남동공단> (새만화책. 2013, 3.)

 

 

 

 

남동공단은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수도권의 대표적 공업단지이다. 상대적으로 외곽에 위치해 있고 인근에 공공시설이나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름이긴 하지만 인천 토박이도 평생 가 볼 일 없는 곳 중 하나이다. 나도 이십대의 후반이 되어서야 우연히 버스를 타고 지났을 뿐이다.

 

지나던 날이 기억난다. 바둑판처럼 잘 구획된 사차선 양쪽으로 중소형의 회사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오가는 사람이 적어 조금 을씨년스러운 것 말고는 안산이나 대구 등에서 보아 온 흔한 공단의 모습일 뿐이었다.별다를 것 없는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별다른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어오던 남동공단은 '경부선 라인만 발전을 시켜줘서 한맺힌 충청, 라 애들이 먹고 살려고 올라와 자리잡고는 술만 먹으면 선동렬하고 김대중 찾아대는' 곳이며 '조선족과 동남아 애들이 수틀리면 제끼고 도망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군대도 다녀왔다지만, 그런 남동공단을 지나는 버스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타도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양코쟁이든 동남아인이든 외국인 보기 어려운 천에서 과연 이따금 낯선 모습의 작업잠바들이 지나가고는 있어도, 정말로 별다를 것이 없었다. 남동공단을 벗어나고 나서야 가슴이 내려앉는 한숨이 나왔고, 잠시 뒤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기다렸다. <남동공단>이라는 이 책, 도서관에 들어오기를. 화제가 된 책은 독서 예정 목록에 제목을 달아 두고 천천히 기다렸다가 이따금 검색해 보면 언젠가는 들어와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만화책이라 그런지 출간된 지 1년이 지나도록 들어오질 않아, 수선스레 구매 신청까지 해서 받아보았다. (대기업이 점령한 뒤로 학생 당 구매 신청 도서 수나 신청 금액에 제한이 생긴 몇몇 대학과 달리, 연대는 '아직까지는' 국내 도서에 한정해 제한이 없다.)

 

작가도 '남동공단'이라는 제목을 듣고 혹 독자가 멋대로 기대를 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결말 부분으로 갈수록 '뭐야, 이거'하고 생각하다가 마지막 장을 보니 거기에야 '작가의 말'이 실려 있었다.

 

'...(남동공단의 방위산업체에서 복무를 하고) 제대 후 나는 공장에서의 경험을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 만화가 공장 노동자의 이야기라고 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만든 만화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혹시나 정치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나는 공장에서의 경험을 고스란히 만화로 녹여 내면 보는 사람들이 그 자체로 재밌게 읽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이 만화를 통해 잘 전달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작가의 말 그대로, 만화는 한 평범한 청년이 방위산업체 복무로 남동공단의 한 공장에 배치되어 고참이 될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서투르게 일을 배우다 눈에 질산이 튀기도 하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손가락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군대로 말하면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직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고, 예쁜 여직원에게 호감이 가기도 하는 등 사건 위주의 에피소드가 이어지지만, 그 내용은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담담함은 삼성을 비판하는 만화책인 <먼지 없는 방>이나 <사람 냄새>의 담담함과는 다르다. 두 책은 비참한 현실을 일부러 건조하게 그림으로써 독자가 그 거리감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게 만드는 장치로 담담함을 사용했다. 기획의도이고 전략이었던 셈이다. 한편, 이 책 <남동공단>은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내'는 데 목표를 두었는데, 어찌 보면 특별할 수 있는 그 경험들이 겪다 보니 평범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담담한 톤을 유지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위에 소개한 에피소드들은 주인공의 주변 환경이나 내면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슥슥 흘러간다. 화려한 스크린톤이나 특이한 구도 등을 취하지 않는 이 책에서 클로즈업이나 움직임 선, 강조 선 등이 갑작스레 활발하게 사용된 장면은 직원들과 함께 쳤던 복식 탁구 에피소드 정도이다. 상대편에 평소 얄미워하던 직원이 있었는데 그를 상대로 하여 이겼다는 것이 에피소드의 전말로, 이 역시도 그 후 얄미운 직원과의 관계나 주인공의 내면에 큰 변화를 끼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작가의 말 그대로, 있었던 일들을 만화로 표현해 내었을 뿐이다. 멋대로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했다가 한 것은 내 잘못이고, 비록 마지막 장에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도 그런 부분에 대한 우려와 해명을 충실히 하였다. 집필 의도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다시 읽어보니 분명히 고유한 매력을 가진 책이었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한 사람이 3년 반 동안 겪었던 일들 중에 '읽는 사람이 재미있어할 만한' 에피소드들을 골라 배치한 것이므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술자리에서 들려주는 그간의 인생 이야기 정도의 재미는 충분하다.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방위산업체 복무의 실상, 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하고 불안정한 노동 환경,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시선 등을 읽어내고 스스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나름의 재미를 찾은 두 번째의 독서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독서의 독후감이 대단히 무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